[천자칼럼] 올드보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접대용이거나 자기 위로용 멘트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이승만이 폐허 속 신생 독립국의 초대 대통령을 맡아 자유민주공화국의 주춧돌을 놓은 게 73세 때다. 이병철도 온갖 회의론을 이겨내고 73세에 삼성 반도체 신화를 본격적으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이 듦은 경험과 지혜의 축적 과정이다. 칸트는 57세에 ‘가장 위대한 철학서’로도 불리는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오늘날 신체 나이로 치면 70세는 족히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춘과 노년에 대한 세상 인식의 변화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3)는 “내가 살아보니 90은 돼야 좀 늙더라”고 했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말이다. 유엔도 8년 전인 2015년에 이미 18~65세를 청년, 66~79세를 중년, 80세부터를 노년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노익장 바람은 늘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정치권이다. 거대 야당에선 80대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70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이재명 대표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현역 복귀를 노리고 있다. 여권에서도 이인제 등 올드보이의 내년 총선 출마설이 솔솔 나온다. 정치권 입김이 강한 금융 통신 등은 올드보이의 안마당이 된 듯하다. KT 차기 대표에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수석을 지낸 윤진식 전 장관(77)이 유력하다는 전언이다. BNK금융지주에도 70대인 이팔성 전 우리금융 회장, 김창록 전 산업은행 총재 등이 회장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경험과 관록을 앞세운 노년의 지혜가 있겠지만 4차 산업혁명과 선진 금융의 전진기지를 이끌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해진다.

‘올드보이 귀환’은 윤석열 정부만의 일이 아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고질병이다. 이명박 정부에선 ‘좌파 정부 10년’을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관료들이, 박근혜 정부에선 아예 과거 박정희 시대 주역들이 적잖이 요직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 때도 10년 전 노무현 정부 시절 인사들이 활개를 쳤다. 김 명예교수는 “노년에는 나를 위한 꿈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꿈을 꿔야 한다”고 했다. 지금 거명되는 사람들이 그만한 태도와 용기를 갖고 있을까.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