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책조합 잘하면 금융위기 피한다
‘정책조합(policy-mix)’이란 용어는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하겠지만 계량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겐 잘 알려져 있다. 계량경제학은 경제이론, 수학, 통계적 추론 등의 분석 도구를 사용해 경제 관계를 경험적으로 결정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처음 개척한 학자는 네덜란드 에라스무스대의 얀 틴베르헨 교수와 노르웨이 오슬로대의 랑나르 프리슈 교수였다. 두 교수는 1969년 공동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틴베르헨 준칙’이 널리 알려졌다. 이 준칙에 따르면 만일 달성할 경제목표가 X개 있으면 정책 수단은 적어도 X개 있어야 한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시카고대의 로버트 먼델 교수는 국제수지 균형과 잠재성장률 실현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융과 재정 두 개 정책을 적절하게 조합하는 ‘정책조합’ 방법을 제시했으며, 유로화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설명해 199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20년 시작된 코로나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급등하기 시작했으며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으로 공급망이 무너졌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원유 공급가격이 급등함으로써 세계가 고금리·고물가로 시달리고 있다. 지난 1년간 한국은행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투기적 자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썼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통화 긴축에 맞춰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상해 왔다. 그러나 효과는 별로 없다. 물가 안정과 자본 유출 방지라는 두 개의 목표를 고금리 정책 하나로 해결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환율은 널뛰기를 계속하고, 외환보유액은 줄어들고 있다. 작년 4분기부터 무역적자를 내기 시작했으며 규모가 서서히 커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만9400달러로 한국의 두 배가 넘는다.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싱가포르만 금융경제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싱가포르의 경제시스템과 정책 운용이 매우 합리적이고 선진형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선진국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자국의 장점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다. 물가, 금리, 환율이 투명하게 안정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외국인의 투자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준다.

한국은 환율과 성장은 기획재정부가, 금리와 물가 안정은 한국은행이 최선의 정책을 각자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외환·금융위기가 염려될 때는 두 기관이 사전 협력을 통해 가장 합리적이고 투명한 정책조합 준칙을 만들 필요가 있다.

지금은 경제 선진국인 미국의 정책을 많이 배우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금리 및 통화 정책은 무작정 따라 할 수 없다. 미국은 달러 가치를 적절한 수준에 둬 엄청난 주조 이익을 향유할 수 있다. 금리를 적정 수준에 둠으로써 중산층의 저축을 장려해 투자 재원을 조달하고 외국으로부터 자본을 얼마든지 유인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중국의 도전과 위협에 금리와 통화 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미국의 금리 통화 정책을 여과 없이 답습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국이 600만 인구도 안 되는 싱가포르 금융시스템과 정책을 따라 할 수도 없다. 우리 사정에 맞는 경제시스템과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환율 안정과 물가 안정을 위해 기재부와 한은이 협의해 한국형 ‘정책조합’ 시스템을 개발하고 최선의 기준금리와 환율 조합을 찾아야 한다.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