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의 사치를 산다…'하이엔드 드링커'
“나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프랑스 식사치고는 양이 많았지만, 스페인식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양을 배분한 듯 보였다. 나는 반주로 포도주를 한 병 마셨다. 샤토 마고였다.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며 혼자 마시는 기분이 좋았다. 포도주 한 병은 좋은 반주였다.”(<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종전 후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20년대 유럽. 파리특파원으로 유럽에 머물고 있던 제이크는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카페에서 홀로 샤토 마고를 홀짝였다. 격정적인 투우 경기가 열리는 ‘산페르민’ 축제를 막 즐기고 온 참이었다.

스페인의 정열이 과했던 탓일까. 사랑하는 여인 브렛은 열아홉 살의 잘생긴 투우사와 밀월여행을 떠났다. 참전 중 부상으로 성(性)불구가 된 제이크는 차마 브렛을 잡지 못하고 해안가 카페에 막막히 앉아 마음을 달랬다.

샤토 마고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와인으로 잘 알려졌다. 사랑이 넘친 나머지 손녀딸 이름도 ‘마고’라고 지었다. 블랙커런트 향을 깊숙이 품은, 부드러운 질감의 검붉은 ‘와인의 여왕’. 제이크의 마음속 날뛰는 황소를 다독인 것도 샤토 마고의 온화함이었나보다.

샤토 마고는 와인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5대 샤토’에 속한다. 5대 샤토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나온 와인 중에서 그랑크뤼 1등급에 속하는 다섯 개 와인을 일컫는다. 샤토 마고를 비롯해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등이다.

‘와인 중의 와인’이라는 수식이 붙는 5대 샤토의 가격은 한 병에 100만원이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한다. 빈티지와 컨디션이 좋으면 가격이 수천만원까지 널뛴다.

부담스러운 가격임에도 5대 샤토는 내놓으면 팔린다. 고급 술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하이엔드 드링커’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방증이다. 한 백화점에 따르면 최근 2년 새 병당 100만원이 넘는 와인·위스키 등 고가 주류 매출이 매년 20~30%씩 늘어나고 있다.

백화점뿐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고가 와인이 팔리는 시대다. GS25는 4년 전인 2019년 샤토 마고 2000년 빈티지를 20병 한정으로 99만원에 내놨다.

당시만 해도 ‘100만원짜리 와인이 과연 편의점에서 팔릴까’를 두고 업계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과는 30분 만에 완판. 5대 샤토를 하나로 묶은 1000만원짜리 세트 다섯 점도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자동차 한 대 값에 달하는 위스키를 사기 위해 주당들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이야기도 옛말이다. 전 세계에 360병밖에 없는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그란트 60년’ 29병도 지난해 한국 땅을 밟자마자 완판됐다.

이 위스키 한 병(700mL)의 가격은 4000만원에 달한다. 한 잔(30mL)만 마신다고 쳐도 170만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싱글몰트 위스키 ‘고든앤맥페일 글린리벳 제너레이션 80년’(750mL)도 2억5000만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도 매장에 전시되자마자 팔려나갔다.

술 한 병에 수백만, 수천만원을 쏟는 이들의 소비를 ‘별종들의 객기’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이런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엔드’를 향해 치닫는 주당들은 주류시장의 대세가 됐다.

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