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쩐의 전쟁' 주총이 괴로운 기업들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다. 오는 15일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포스코홀딩스(17일) LG디스플레이(21일) 네이버(22일) 현대자동차(23일) LG에너지솔루션(24일) SK하이닉스(29일) 등 주요 기업의 주총이 이어진다. 이름도 복잡한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세가 거센 데다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 목청을 키운 소액주주의 눈치를 살피느라 기업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SM엔터테인먼트 고려아연 오스템임플란트 성신양회 등 경영권 분쟁에 휩싸인 기업들은 더더욱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 ‘거수기’ 소리를 듣는 이사진 개편과 함께 행동주의 펀드도 상대해야 하는 금융회사들도 긴장하는 분위기다. SM엔터 경영에도 개입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KB를 비롯한 7개 금융지주에 배당 확대를 요구했다. JB금융은 얼라인 측 요구를 거절해 주총 표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경영권 다툼’ 기업은 물론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고배당과 자사주 소각 압력을 받는 기업들은 이를 막느라 ‘쩐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돼 주총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2019년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해외 기업 48곳을 분석했더니 설비투자가 공격 기간에 2.4%, 이듬해엔 23.8% 감소하고 순이익도 각각 46%, 84% 줄었다는 조사 결과(한국경제연구원)도 있다.

행동주의 펀드가 공격한 한국 기업은 2017년 3곳에 불과했는데, 지난해 47개로 급증했다. 타깃인 알짜기업이 늘어난 데다 과거 정부가 경영권 방어를 어렵게 하는 쪽으로 상법, 자본시장법 등을 개정해 판을 깔아줬다.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은 경영 투명성 제고와 주주 중시, 시장(주주)과의 소통 강화 등 긍정적 측면도 있다. 다만 국내의 인식이 부정적인 것은 타이거펀드, 소버린, 헤르메스, 칼 아이칸, 엘리엇 매니지먼트 등이 SK 삼성 현대차 등 우리 기업과 악연을 맺은 탓이다. SK를 공격한 소버린은 2년 만에 투자금액의 5배인 1조원의 시세차익을 거뒀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한 데 이어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을 무산시켰다.

문제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5% 룰’의 허점을 악용해 경영권을 위협하고 펀드가 연합하는 ‘벌떼(swarm) 공격’ 양상을 보여도 상당수 기업이 무방비 상태라는 점이다. 우리 기업들이 정관에 넣을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은 이사 해임 가중 요건, 이사 시차 임기제, 인수합병 승인 안건의 의결정족수 가중 규정, 황금낙하산(거액 퇴직금 지급) 조항 정도다. 기껏해야 주총 안건 가결을 어렵게 하거나 이사진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을 막는 정도다.

주요 7개국(G7) 중 차등의결권·포이즌필·황금주 등 경영권 방어 3대 장치를 모두 불허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포드자동차 나이키 알파벳 메타 등 미국 기업은 물론 일본(사이버다인), 중국(유클라우드, 콰이서우테크놀로지) 기업들도 차등의결권을 활용한다. 창업주가 자신의 지분율을 유지하면서 외부 자금을 유치할 수 있고, 적대적 세력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장기 비전에 따라 경영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벤처기업 대상의 차등의결권마저 ‘1주 1의결권’의 상법 에 어긋난다며 국회에서 번번이 발목이 잡히고 있다. 대주주 의결권 제한, 감사위원 분리 선임 등 한국에만 있는 규제를 ‘창출’한 정치권이 경영권 방어 장치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대주주 지분을 지속적으로 희석시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을 유지하면서 차등의결권마저 부정하면 남아날 기업이 얼마나 있을까. 이러고도 기업에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요구한다면 염치가 너무 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