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얼마나 자주 미소 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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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기쁨이 괴로움 뒤에 온다는 걸 자주 잊고
작은 일에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이 정말 선을 위해 분투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기쁨이 괴로움 뒤에 온다는 걸 자주 잊고
작은 일에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이 정말 선을 위해 분투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살인, 폭력, 사기, 공갈, 협박 따위의 고약하고 몹쓸 악은 인간 존엄성에 반하는 나쁜 방식으로 자기 편의를 개척하는 행위 일체를 뭉뚱그려 드러낸다. 이런 행위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면 법에 의해 처벌받지만 현실에는 그보다 처벌받지 않는 작은 악이 더 바글거린다. 악의 무두질 속에서 우리 양심은 무뎌진다.
이런 세계에서의 삶은 재난 영화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악의 파편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재난 영화는 쉬지 않고 상영된다. 이것을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라고 한다.
‘빌어먹을!’이라고 내뱉는 처벌받지 않은 작은 악에 대한 관조를 담은 시를 읽으며 풋, 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약한 악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래서 악이라는 깨침을 갖기가 힘들다. 어쩌면 들뜬 기분의 왕이 저지른 이 작은 악은 그저 방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증식과 속도의 효율성을 섬기는 사회에서 느림과 빠름은 필경 권력의 비대칭 관계를 이룬다.
‘좁은 골목길’은 상호 이해가 충돌하는 현실의 장이다. 오로지 속도를 선으로 여기는 오토바이가 좁은 골목길에서 느린 리어카를 추월하려고 경적을 울리며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 사랑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라고 비는 철부지 여자의 모습은 희극이다. 비루한 행위자의 편에서 약자 보호의 윤리를 몰각한 채 제 사랑의 승리를 빌며 몰입할 때 그것은 “빌어먹을!” 연애로 변질된다. 악이란 아무리 작아도 “빌어먹을!”이란 욕을 먹을 만큼 부적절하고 부주의한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렇듯 악은 현실에 미세플라스틱 조각처럼 부스러져 흩어져 그게 나쁜 것이라는 미약한 인지조차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잦다. 심지어 과로와 번아웃도 제 심신에 저지른 작은 악의 합성물이다. 자연 상태인 심신이 고갈되는 것은 우리 욕망이 시킨 자기 착취의 결과라는 한에서 그렇다.
악과 선은 분리가 안 된 미분화로 얽혀 있어 어디가 악이고 어디가 선인지를 자르고 가리는 것조차도 모호하고 불가능하다. 선은 단순하나 악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띤다. 악은 우리 안의 도덕적 취약성과 관련이 있고, 제 잇속과 향유를 앞세우는 나쁜 본성에서 발현된다. 그러나 때때로 악과 맞서 싸워 “영웅적으로 승리하기를 원” 할 때 악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통찰은 꽤 놀랄 만하다.(어니스트 베커, <악에서 벗어나기>) 사실 우리는 악의 창궐과 크든 작든 연루된 채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일이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악을 쌓는 일인 까닭이다.
결핍과 충만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면서 진전하는 게 인생이라면 욕망은 이 진자운동의 핵심 동력이다. 현실은 제 안의 바글거리는 욕망이 상호 충돌하는 장이고, 사람은 누구나 제 욕망과 이익을 앞세우는 법이다. 알다시피 생명과 자기 보존 욕망은 가장 기초적인 본성이고, 욕망은 현실의 배치를 자기중심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본디 욕망은 삶의 역동을 품으면서 온통 회색빛인 삶에 환희와 쾌락으로 빚어진 색깔을 부여한다. 욕망이 없다면 삶의 지속이나 성취의 화사함, 영웅적 승리의 기쁨도 없이 밋밋할 테다. 욕망 자체를 비난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 이성을 움직여 성찰하는 태도는 사람이 마땅히 취할 바다. 제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게으름이 우리를 일그러진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 제 욕망에 마구 휘둘린다면 의미로 충만한 향기로운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사랑하고, 마시고, 미소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하지만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사랑과 음식으로 생명을 부양하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미소 짓는 걸 선이라고 믿었다. 선은 육체에 주어진 기쁨이자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보람이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미소 짓는가? 기쁨이 괴로움 뒤에 온다는 걸 자주 잊고, 작은 일에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이 정말 선을 위해 분투하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제 욕망을 거머쥐고 조절하며 타인을 기쁘게 맞지 않는다면 사랑도 미소도 불가능하다. 더 많이 사랑하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더 자주 미소 지어라. 왜냐하면 그게 제 안의 악을 누르는 선을 위한 분투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의 삶은 재난 영화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악의 파편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재난 영화는 쉬지 않고 상영된다. 이것을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라고 한다.
하필 '빌어먹을'이 나오는 시를
“남자의 오토바이가/ 좁은 골목길/ 앞서가는 폐지 리어카 노인한테// 너무 작고 말라서/ 잘 보이지도 않던 노인한테// 미친 듯이 경적을 누르며/ 욕을 해 대는 남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그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이 사랑이 영원하게 해 주세요/ 빌기나 했던// 빌어먹을 시절이 있었다/ 빌어먹을!”(김경미, ‘그런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빌어먹을!’이라고 내뱉는 처벌받지 않은 작은 악에 대한 관조를 담은 시를 읽으며 풋, 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약한 악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래서 악이라는 깨침을 갖기가 힘들다. 어쩌면 들뜬 기분의 왕이 저지른 이 작은 악은 그저 방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증식과 속도의 효율성을 섬기는 사회에서 느림과 빠름은 필경 권력의 비대칭 관계를 이룬다.
‘좁은 골목길’은 상호 이해가 충돌하는 현실의 장이다. 오로지 속도를 선으로 여기는 오토바이가 좁은 골목길에서 느린 리어카를 추월하려고 경적을 울리며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 사랑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라고 비는 철부지 여자의 모습은 희극이다. 비루한 행위자의 편에서 약자 보호의 윤리를 몰각한 채 제 사랑의 승리를 빌며 몰입할 때 그것은 “빌어먹을!” 연애로 변질된다. 악이란 아무리 작아도 “빌어먹을!”이란 욕을 먹을 만큼 부적절하고 부주의한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우린 악과 연루된 채로 살아간다
검사 아버지를 둔 학교폭력 가해자가 마땅히 받을 처벌을 유예받으며 유명 대학에 진학했는데, 정작 피해자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느라 대학 진학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며 여론이 들끓자 국가 중요 직책에 임명받은 그 가해자의 아버지가 하루 만에 직에서 물러났다.이렇듯 악은 현실에 미세플라스틱 조각처럼 부스러져 흩어져 그게 나쁜 것이라는 미약한 인지조차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잦다. 심지어 과로와 번아웃도 제 심신에 저지른 작은 악의 합성물이다. 자연 상태인 심신이 고갈되는 것은 우리 욕망이 시킨 자기 착취의 결과라는 한에서 그렇다.
악과 선은 분리가 안 된 미분화로 얽혀 있어 어디가 악이고 어디가 선인지를 자르고 가리는 것조차도 모호하고 불가능하다. 선은 단순하나 악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띤다. 악은 우리 안의 도덕적 취약성과 관련이 있고, 제 잇속과 향유를 앞세우는 나쁜 본성에서 발현된다. 그러나 때때로 악과 맞서 싸워 “영웅적으로 승리하기를 원” 할 때 악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통찰은 꽤 놀랄 만하다.(어니스트 베커, <악에서 벗어나기>) 사실 우리는 악의 창궐과 크든 작든 연루된 채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일이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악을 쌓는 일인 까닭이다.
결핍과 충만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면서 진전하는 게 인생이라면 욕망은 이 진자운동의 핵심 동력이다. 현실은 제 안의 바글거리는 욕망이 상호 충돌하는 장이고, 사람은 누구나 제 욕망과 이익을 앞세우는 법이다. 알다시피 생명과 자기 보존 욕망은 가장 기초적인 본성이고, 욕망은 현실의 배치를 자기중심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본디 욕망은 삶의 역동을 품으면서 온통 회색빛인 삶에 환희와 쾌락으로 빚어진 색깔을 부여한다. 욕망이 없다면 삶의 지속이나 성취의 화사함, 영웅적 승리의 기쁨도 없이 밋밋할 테다. 욕망 자체를 비난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찮은 악'과 욕망의 상호 충돌
욕망이란 동력이 성취해내는 살아남음은 불운을 잘 피한 운 좋음이고, 그 자체로 권력의 영광을 거머쥐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누구든 악과의 연루에서 분리되는 일은 불가능한데, 그것은 사람이 영웅적 승리를 갈망하거나 제 가치를 증명하는 의미화의 과정에서 악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음에는 갖가지 추악한 소문과 혐의가 따라붙는다. 끊임없이 제 욕망을 뒤집어보고 그 안팎을 요모조모 살피는 건 우리 안의 윤리의식이 작용하는 탓이다.제 이성을 움직여 성찰하는 태도는 사람이 마땅히 취할 바다. 제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게으름이 우리를 일그러진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 제 욕망에 마구 휘둘린다면 의미로 충만한 향기로운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사랑하고, 마시고, 미소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하지만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사랑과 음식으로 생명을 부양하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미소 짓는 걸 선이라고 믿었다. 선은 육체에 주어진 기쁨이자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보람이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미소 짓는가? 기쁨이 괴로움 뒤에 온다는 걸 자주 잊고, 작은 일에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이 정말 선을 위해 분투하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제 욕망을 거머쥐고 조절하며 타인을 기쁘게 맞지 않는다면 사랑도 미소도 불가능하다. 더 많이 사랑하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더 자주 미소 지어라. 왜냐하면 그게 제 안의 악을 누르는 선을 위한 분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