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완성은 '함께 채우는 것'
여러 학문 분야에서 ‘상보적(相補的·complementar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로 겹치지 않되 상호 보완을 이루며 하나의 개념이나 단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언어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령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 주격조사에 관해 설명하려면 ‘이’ 혹은 ‘가’의 선택이 앞소리 받침의 유무에 따라 서로 겹치지 않게 상호 보완돼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다시 말해 ‘이’와 ‘가’는 그 쓰임새를 구분해야 하지만 동시에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함께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이와 참 닮았다.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러한 세상의 진실을 조금 깨닫게 된 자의 새삼스러운 정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높고 낮음, 뜨거움과 차가움, 산과 강,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교수와 학생 등 자연의 모든 현상과 단위는 서로 구분돼 존재하되 겹치지 않는 각 구성체의 합인 동시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에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금의 우리 사회가 아파하는 인간관계의 ‘단절’은 상보를 거부하려는 고집에서 비롯한 부작용일 테고, 세대와 계층 간 ‘갈등’은 나(I)의 가치를 향해 너(Thou)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는 역시 상보의 거부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겪는 ‘소통의 부재’도 마찬가지다. 겹치지 않게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동의 목표와 선을 향해 함께하는 상보의 과정이 원활한 소통을 그 충분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학부생 때 처음 접한 J D 샐린저의 소설을 그때는 왜 뭔가 시원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리만치 갑갑하게 느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서서히 알 것도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간격을 좀 두고 봤던 <바나나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은 참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두 소설의 주인공 홀든과 시모어가 찾고 있었던 것이 혹시 ‘상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일어난다. 소통하고자 이리저리 발버둥 쳤지만, 세상은 끝내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아픈 결말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순수의 상징처럼 등장한 두 소녀가 그나마 약간의 위로가 됐을 뿐이다.

이것도 문학과 어학의 상보라고 할 수 있을까? 새벽에 참 희한한 몽상을 한 것 같다. 그 와중에 같은 어원인 ‘완성(complete)’이 ‘함께(com)+채우는(plete)’ 것이라니, 어떤 확신이 드는 것도 같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