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찰용 무인기가 흑해 상공에서 러시아 전투기와 충돌해 바다로 추락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후 첫 번째 물리적 충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미국과 러시아 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美 “고의적” vs 러 “경계 침범”

러 전투기·美 무인기 흑해서 '쾅'…냉전 후 첫 충돌
미군 유럽사령부는 14일(현지시간) “이날 오전 7시께 흑해 상공의 국제공역을 운항하던 무인기 MQ-9이 러시아 전투기 SU-27기와 부딪치며 추락했다”고 밝혔다. 충돌 지점은 크림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120㎞ 떨어진 곳으로 전해졌다.

미군에 따르면 SU-27기 두 대는 이날 충돌 30분 전부터 MQ-9을 겨냥해 수차례 연료를 뿌렸다. 이후 SU-27기 한 대가 꼬리 부분에 달린 MQ-9의 프로펠러를 들이받아 추락시켰다.

‘리퍼’로 불리는 MQ-9은 미 공군의 주력 군용기로 공격과 정찰 임무에 사용된다. 이날 추락한 MQ-9은 비무장 상태로 어느 나라의 영공에도 속하지 않은 국제영공을 누비고 있었다고 미군은 설명했다. MQ-9은 작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부터 흑해 상공을 비행했다.

이번 사고는 러시아군의 고의성이 명백하다는 게 미국 측 판단이다. 미군 관계자는 “훨씬 빠른 속도의 러시아 전투기가 카메라와 센서를 손상시키기 위해 프로펠러로 구동되는 MQ-9 주위를 반복적으로 지나가며 연료를 쏟아부었다”고 설명했다.

제임스 헤커 미 공군 유럽·아프리카 사령관은 “MQ-9이 국제공역에서 일상적인 작전을 수행하던 중 러시아 전투기에 의해 요격되면서 완전한 손실을 입었다”며 “안전하지 않고 전문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두 항공기가 모두 추락할 뻔했다”고 말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상대국 군용기를 가로막으며 대치한 일은 이전에도 빈번히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러시아의 방해 자체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번 사태는 위험하고 어설프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미 정치전문 매체 더힐도 “이번 사건은 러시아 전투기가 전쟁 중에 의도적으로 미국 항공기를 파손한 최초의 사례”라고 분석했다.

군사적 긴장 고조되나

이번 충돌과 관련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무인기 차단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군사 기밀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 비판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오후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대사를 초치했다. 린 트레이스 주러시아 미국대사는 러시아 외교부에 항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러시아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성명을 통해 “러시아 전투기는 미국 무인기와 접촉하지 않았다”며 “미국 무인기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 임시로 설정한 공역의 경계를 침범한 후 급격히 조종력을 잃고 바다로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자칫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번 사건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블룸버그는 “흑해 충돌 사건은 우크라이나 전쟁 후 사실상 관계가 단절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