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북'은 창작 뮤지컬의 미래라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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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니아 고윤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쓰는 뮤지컬 리뷰, ' 뮤빠(뮤지컬 빠개기)'입니다.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표작, '레드북'이 돌아왔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인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한국 창작 뮤지컬 속 낭중지추같은 작품이다. 2018년 정식 초연 이후 벌써 세번째 공연이다. 지난 3월 14일부터 오는 5월 28일까지, 두달 넘게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지난 3월 22일 박진주 배우가 주연 '안나역'으로 나선 레드북을 직접 관람하고 왔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좌석이 찼다. 여성 관객이 90% 이상이었다.
◆레드북은 어떤 뮤지컬?
레드북은 지난해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 7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주제만 봐도 기존의 창작 뮤지컬과는 다르다. 한국의 1세대 창작 뮤지컬은 한국식 신파를 앞세우곤 했다. 또는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며 관객을 끌어모았다. 레드북은 전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적 주제를 다뤘다. 산업혁명과 식민지전쟁으로 설명되는 19세기 영국이 배경이다. 사회는 바뀌는데 여성의 지위와 인권은 이를 따르지 못한 시대다.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벌어졌다. 1878년 런던대학이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인 게 상징적이다.레드북의 주인공 '안나'도 가정에만 충실해야 했던 기존의 여성상을 거부했다. 안나는 여성도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대항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안나가 이를 극복하고 작가로서 성장해가는 게 주요 줄거리다.
여성인권 문제를 다루지만 무겁지 않다. 너무 진지하거나 한쪽 의견에 치우져지지 않았다. 젠더 이슈에 민감한 시대지만 누구든 공감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오히려 봄날에 어울릴 만한 사랑 이야기와 유쾌한 넘버(노래)들도 가득차있다. 뮤지컬 데이트하기엔 딱이다.
◆박진주가 연기한 안나
이번 레드북의 안나역은 배우 박진주를 비롯해 옥주현, 민경아 등 3명이 맡았다. 이 중 특별히 박진주 공연을 선택해 관람했다. 2021년 가수 겸 배우인 김세정이 안나역을 매우 성공적으로 해냈던 만큼 새로운 뮤지컬 스타의 등장을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박진주 배우는 이번이 네번째 뮤지컬 무대다. 박진주는 과거 예능에서도 맑은 음색과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유명했다. 물론 뮤지컬 주연을 맡는 건 다른 영역이다. 무대의 공간을 목소리로 채울 수 있는 발성을 갖춰야 할 터. 여러 곡을 오랜 기간 불러야 하는데서 오는 목의 부담도 만만찮다.박진주가 첫 노래인 '난 뭐지'의 '뭐긴 뭐야 나는 나야 나는 안나'를 부르는 순간,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박진주는 보이지 않고, 안나라는 캐릭터만 눈에 들어왔다. 박진주의 맑은 음색은 안나의 밝고 당돌한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배우의 가장 큰 장점인 정확한 발음과 연기력도 안나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극 중 내내 주요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사랑은 마치' 등의 곡을 무리없이 소화했다.
일부 고음 영역에서는 음처리가 불안했다. 발성에 있어 목을 많이 쓰다보니 눌린 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뮤지컬 배우가 목에 힘을 줘서 내는 눌린 소리는 무대 공간을 채우기 어렵다. 소리가 납작하게 느껴진다. 끝음 처리가 깔끔하지 못하거나, 팔세토(가성)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극 중 몰입을 방해할 수준은 아니었다. 5월말까지 공연이 이어지는 만큼 목관리는 박진주 배우의 과제가 될 듯 하다. 목을 많이 쓰는 발성이 아니더라도 안나의 솔로곡은 목에 무리를 주는 부분이 많다.
◆훌륭한 조연배우들
이날 공연은 다른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브라운 역을 맡은 송원근은 극중 내내 안정적인 발성과 연기로 좌중을 사로 잡았다. 특히 미성을 사용해 브라운 특유의 소심하지만 자상한 캐릭터를 잘 표현해냈다. 그가 곡을 해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섬세한 배우인지도 티가 났다. 이날 조연 중에서는 도로시와 바이올렛역을 겸한 한보라 배우가 빛났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발성과 곡 해석력 그리고 표현력까지 이날의 베스트라 할 만 했다. 존슨과 앤디역을 겸한 김대종 배우와 헨리와 잭 역할을 겸한 김승용 배우도 노래와 연기 모두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판사 역할을 맡은 박세훈 배우도 표정 연기와 노래 표현 등이 뛰어났다. 15명의 출연 배우 모두 모든걸 쏟아 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기자를 포함한 관객들도 느꼈고, 환호로 답했다.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
레드북은 세번째 정식 공연이다. 삼연이지만 재연때와 달라진 게 없다. 통상 세계적인 뮤지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연출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스토리를 일부 수정한다. 한번 내보내면 끝인 영화와는 다른 부분이다. 그동안 레드북에 대해서는 일부 스토리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었다.예를 들어 안나가 왜 많은 직업 중에서 작가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안나 캐릭터가 너무 단순하게 표현된다는 지적이다. 극에서는 안나가 어릴적 하녀로서 모셨던 바이올렛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한다. 안나가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줬고, 할머니가 글을 써보라고 조언했단 식이다.
하지만 안나가 어떻게 작가로서 재능을 갖게 됐는지, 왜 작가가 되려고 하는지에 대한 고민 장면은 없었다. 안나와 브라운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안나는 브라운이 자신을 응원해줬다는 이유로 애정을 느꼈다. 브라운은 안나가 떠난 이후 자연스레 그리워한다. 무언가 생략된 느낌이다. 제한된 시간안에 연출을 해야 한다지만 관객들이 안나라는 캐릭터에 좀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추가적 서사가 필요하다.
◆아쉬운 무대 연출
무대 연출도 아쉬웠다. 무대는 양쪽의 4개의 건물이 기본 포맷이다. 극 중 내내 큰 변화가 없다. 배우들의 동선도 평면적이다. 조명도 배우를 비추는 수준일 뿐, 연출 도구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예를 들어 안나가 열심히 소설을 쓰는 1막 후반 장면이다. 조명은 안나를 집중적으로 환하게 비추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안나가 열심히 노력하는 장면의 시간 흐름은 조명으로 표현될 수도 있었다. 비용 문제가 컸으리라 추측된다. 맵핑 프로젝트 기술을 통해 이를 만회하려한 흔적이 보인다. 양쪽 건물에 프로젝트를 쏴서 그림을 입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중복됐다. 예를 들어 장미 맵핑은 다른 장면에 3번 이상 중복으로 쓰였다.
연출 자체가 난해한 경우도 있었다. 안나가 세간으로부터 비판 받는 장면 마지막에서 무대 뒤 오케스트라를 갑자기 공개하는 장면이 그 예다. 극의 전개와 무관한 연출이었다.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장면도 그렇다. 시위 장면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수많은 뮤지컬에서 자주 등장하는 만큼 연출 사례가 다양하다. 피켓은 그 중 가장 '저렴한' 방식이다. 법정 장면에서 배경이 된 휘장이 실제 빅토리아 시대 휘장과 다르다는 점 등 디테일도 약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배우는 총 15명. 한 배우가 2~3개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맡았다. 다른 뮤지컬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소극장 뮤지컬에서는 일인 다역이 재미 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대형 뮤지컬에서는 다르다. 과도하게 중복된 역할이 관객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몰입을 해칠 수 있다. 레드북이 그랬다. '아까 그 배우네'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3~4명으로 구성된 노래들도 배우와 화음 구조가 비슷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덩치를 키운 소극장 뮤지컬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무대 연출의 수준과 배우 수는 결국 수익성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옥주현 등 스타 배우를 섭외하는 만큼 수익성을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나타난다. 하지만 레드북은 벌써 세번째 공연이다. 작품 자체가 업그레이드될 시기가 됐다.
작품의 개연성을 높이고 연출에 대한 고민이 좀 더 들어간다면, VIP석 기준 1인 11만원의 가격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이상의 돈을 받아도 될 만한 잠재력이 있는 작품임을 뮤지컬 팬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미래가 레드북에 달려있다.
뮤지컬 레드북은 오는 5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티켓 가격은 VIP석 11만원, R석 9만원, S석 6만5000원.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