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곡히 꽂힌 납활자, 뿔테안경 쓴 老장인들…정겨운 활판인쇄소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구은서의 책이 머무는 집
파주 출판도시 활판공방
사람이 직접 한땀 한땀…
한글자짜리 도장 만든 뒤
짜맞춰서 책 만드는 작업
"활판인쇄 멸종" 우려에
전국 돌며 기계 사모으고
흩어진 장인들도 '수소문'
파주 출판도시 활판공방
사람이 직접 한땀 한땀…
한글자짜리 도장 만든 뒤
짜맞춰서 책 만드는 작업
"활판인쇄 멸종" 우려에
전국 돌며 기계 사모으고
흩어진 장인들도 '수소문'
‘이런 책은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들지?’
작년 말 국내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nox)>를 봤을 때 머릿속에 이런 물음표부터 떠올랐어요. 책의 만듦새가 평범하지 않거든요. 이 책은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 번역가인 카슨이 마약중독자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어요. 192쪽 분량의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쭉 이어 붙여 접은 형태, 관을 연상시키는 사각의 책 상자…. 딱 봐도 정성이 많이 요구되는 책이죠. 오죽하면 이 책을 국내에 들여온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책을 만들어줄 곳을 찾느라 해외까지 갈 뻔했대요. 천신만고 끝에 이 책이 탄생한 곳은 경기 파주의 활판공방입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활판인쇄로 책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책은 오프셋 인쇄로 찍어냅니다. 네 가지 색(파랑·빨강·노랑·검정)을 각각 입힌 알루미늄판을 롤에 끼워 넣고 잉크를 발라 인쇄기를 돌리는 방식으로 글자나 그림을 인쇄하죠. 반면 활판인쇄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인 활자를 일일이 제작한 뒤(주조) 사람이 활자를 골라내고(문선·채자) 짜 맞춰서(조판·식자) 인쇄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파주의 활판공방을 찾았습니다. 북 디자이너였던 박한수 활판공방 대표는 2000년대 초 서체 디자인에 대한 대학원 논문을 쓰다가 국내 활판인쇄의 명맥이 끊길 위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가 명색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곳인데, 오프셋 인쇄 방식 도입 이후 활판인쇄 기계들이 고철로 팔려 녹여지고 있더라고요. ‘이대로면 한국의 활판인쇄는 멸종되겠구나’ 싶었죠.” 그는 전국에서 기계를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활판인쇄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은 뒤 대학교 경비원, 건설현장 일용직 등으로 일하고 있던 장인들을 수소문해 찾아냅니다. 그렇게 2007년 활판공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공방의 든든한 기둥은 식자공 권용국(88·왼쪽), 주자공 김평진(73·오른쪽) 장인입니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수십 년간 ‘잉크밥’을 먹어온 두 사람의 세월이 곧 독보적 노하우죠. 이곳에서 <녹스>를 만든 것도 김평진 어르신이 과거에 아코디언북 형태의 일본 책을 제작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활판공방 안에 자모(활자 틀)를 모아놓은 서랍에는 ‘가나다’ 표시조차 없어요. 암호 같은 숫자만 적혀 있고요. ‘이러면 수많은 글자 중 필요한 걸 어떻게 찾아내시냐’고 질문하니 김평진 어르신은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상관없지”하며 웃습니다. 옛날에 비해 일이 많지 않다 보니 권용국 어르신은 채자와 식자를 모두 맡고 있는데, 수십만 자의 활자 중 가로·세로 각 2㎜도 안 되는 활자를 주름진 손으로 순식간에 뽑아내는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디지털 인쇄에서 나아가 전자책을 보는 시대인데, 이렇게 까다로운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요. 박한수 대표는 “오프셋 인쇄가 손톱 위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거라면, 활판인쇄는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잉크를 입히는 오프셋 인쇄에 비해 눌러 찍는 활판인쇄는 더 오래 글자가 보존되니까요. 이쯤 되면 활판인쇄된 책이 궁금해지죠. 박 대표가 운영하는 ‘시월’ 출판사에서는 ‘활판인쇄 시선집’을 출간 중입니다. 나태주 등 한국 주요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직접 골라 묶어냈다는 의미가 있죠.
활판공방을 찾아간 날, 이곳에는 독일에서 온 손님이 한 명 더 있었어요. 킬 무테지우스 국립예술대를 막 졸업해 북아트 작가로서 첫 전시회를 준비하는 조성호 씨는 “한국의 글자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아 이곳까지 날아왔답니다. 동일한 내용을 한글과 독일어로 각각 활판인쇄해 나란히 걸어두는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요.
이곳에서 ‘활자(活字)’는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글자입니다. 과거 목판인쇄 방식이 나무판에 한쪽 분량의 글자를 모두 파서 종이에 찍어낸 것과 달리, 활판인쇄는 각 활자를 먼저 제작한 뒤 그것을 조합해 인쇄했죠. 원하는 대로 활자를 해체하고 또 짜 맞출 수 있으니 옛사람들 눈에는 마치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겠죠. 시간이 지나 역사 속에 묻힐 뻔한 활자가 이곳에선 생생하게 숨 쉬고 있어요. 전화로 사전 예약한다면 직접 활판인쇄를 해보는 체험 프로그램(유료)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활판공방 옆에는 옛 주조기 등이 전시된 카페 북앤프레스도 운영 중이에요. 활자 보관대를 활용해 만든 테이블에는 활판인쇄된 이런 시 구절이 놓여 있습니다.
“당신, 내게는 참 좋은 사람/만나지 못하고 이 세상 흘러갔다면/그 안타까움 어찌했을까요……”(나태주 ‘꽃 피우는 나무’)
구은서 기자
■ 출판도시 활판공방
△매주 월요일 휴관
△카페는 연중무휴(명절 제외)
△방문 및 체험은 사전예약 필수
작년 말 국내 출간된 앤 카슨의 <녹스(nox)>를 봤을 때 머릿속에 이런 물음표부터 떠올랐어요. 책의 만듦새가 평범하지 않거든요. 이 책은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 번역가인 카슨이 마약중독자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어요. 192쪽 분량의 종이를 아코디언처럼 쭉 이어 붙여 접은 형태, 관을 연상시키는 사각의 책 상자…. 딱 봐도 정성이 많이 요구되는 책이죠. 오죽하면 이 책을 국내에 들여온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책을 만들어줄 곳을 찾느라 해외까지 갈 뻔했대요. 천신만고 끝에 이 책이 탄생한 곳은 경기 파주의 활판공방입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활판인쇄로 책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책은 오프셋 인쇄로 찍어냅니다. 네 가지 색(파랑·빨강·노랑·검정)을 각각 입힌 알루미늄판을 롤에 끼워 넣고 잉크를 발라 인쇄기를 돌리는 방식으로 글자나 그림을 인쇄하죠. 반면 활판인쇄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인 활자를 일일이 제작한 뒤(주조) 사람이 활자를 골라내고(문선·채자) 짜 맞춰서(조판·식자) 인쇄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파주의 활판공방을 찾았습니다. 북 디자이너였던 박한수 활판공방 대표는 2000년대 초 서체 디자인에 대한 대학원 논문을 쓰다가 국내 활판인쇄의 명맥이 끊길 위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가 명색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곳인데, 오프셋 인쇄 방식 도입 이후 활판인쇄 기계들이 고철로 팔려 녹여지고 있더라고요. ‘이대로면 한국의 활판인쇄는 멸종되겠구나’ 싶었죠.” 그는 전국에서 기계를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활판인쇄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은 뒤 대학교 경비원, 건설현장 일용직 등으로 일하고 있던 장인들을 수소문해 찾아냅니다. 그렇게 2007년 활판공방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공방의 든든한 기둥은 식자공 권용국(88·왼쪽), 주자공 김평진(73·오른쪽) 장인입니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수십 년간 ‘잉크밥’을 먹어온 두 사람의 세월이 곧 독보적 노하우죠. 이곳에서 <녹스>를 만든 것도 김평진 어르신이 과거에 아코디언북 형태의 일본 책을 제작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활판공방 안에 자모(활자 틀)를 모아놓은 서랍에는 ‘가나다’ 표시조차 없어요. 암호 같은 숫자만 적혀 있고요. ‘이러면 수많은 글자 중 필요한 걸 어떻게 찾아내시냐’고 질문하니 김평진 어르신은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상관없지”하며 웃습니다. 옛날에 비해 일이 많지 않다 보니 권용국 어르신은 채자와 식자를 모두 맡고 있는데, 수십만 자의 활자 중 가로·세로 각 2㎜도 안 되는 활자를 주름진 손으로 순식간에 뽑아내는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디지털 인쇄에서 나아가 전자책을 보는 시대인데, 이렇게 까다로운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요. 박한수 대표는 “오프셋 인쇄가 손톱 위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거라면, 활판인쇄는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잉크를 입히는 오프셋 인쇄에 비해 눌러 찍는 활판인쇄는 더 오래 글자가 보존되니까요. 이쯤 되면 활판인쇄된 책이 궁금해지죠. 박 대표가 운영하는 ‘시월’ 출판사에서는 ‘활판인쇄 시선집’을 출간 중입니다. 나태주 등 한국 주요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직접 골라 묶어냈다는 의미가 있죠.
활판공방을 찾아간 날, 이곳에는 독일에서 온 손님이 한 명 더 있었어요. 킬 무테지우스 국립예술대를 막 졸업해 북아트 작가로서 첫 전시회를 준비하는 조성호 씨는 “한국의 글자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아 이곳까지 날아왔답니다. 동일한 내용을 한글과 독일어로 각각 활판인쇄해 나란히 걸어두는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요.
이곳에서 ‘활자(活字)’는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글자입니다. 과거 목판인쇄 방식이 나무판에 한쪽 분량의 글자를 모두 파서 종이에 찍어낸 것과 달리, 활판인쇄는 각 활자를 먼저 제작한 뒤 그것을 조합해 인쇄했죠. 원하는 대로 활자를 해체하고 또 짜 맞출 수 있으니 옛사람들 눈에는 마치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겠죠. 시간이 지나 역사 속에 묻힐 뻔한 활자가 이곳에선 생생하게 숨 쉬고 있어요. 전화로 사전 예약한다면 직접 활판인쇄를 해보는 체험 프로그램(유료)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활판공방 옆에는 옛 주조기 등이 전시된 카페 북앤프레스도 운영 중이에요. 활자 보관대를 활용해 만든 테이블에는 활판인쇄된 이런 시 구절이 놓여 있습니다.
“당신, 내게는 참 좋은 사람/만나지 못하고 이 세상 흘러갔다면/그 안타까움 어찌했을까요……”(나태주 ‘꽃 피우는 나무’)
구은서 기자
■ 출판도시 활판공방
△매주 월요일 휴관
△카페는 연중무휴(명절 제외)
△방문 및 체험은 사전예약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