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7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기획안을 영화화한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주인공 나옥분 할머니(나문희 분)가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증언하는 하이라이트 신이다. “We are giving the chance to ask our forgiveness while we are still alive. ‘I am sorry.’ Is that so hard?”(우리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2021년 7월,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한 시사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2017 대선 댓글 조작 사건(드루킹 사건) 유죄 확정으로 재수감된 데 대해 이런 ‘입장’을 밝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야권의 말씀을 잘 듣고 있지만), 청와대는 밝힐 입장이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유지되는 입장이다.”

불리한 상황에서 유체이탈식 화법은 문재인 정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020년 3월, 제5회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에서 천안함 폭침으로 전사한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분향하려는 문 대통령에게 ‘천안함 사건이 누구 소행인지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 소행이란 게 정부의 입장 아니냐”고 했다. 그 옆에서 ‘레이저 눈빛’으로 윤 여사를 쏘아보던 대통령 부인의 모습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장면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서해수호의날 행사에서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사건, 연평도 포격전에서 산화한 55인의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했다. 대통령이 서해수호 55인 이름을 직접 부르는 ‘롤콜(roll-call)’ 추모를 한 것은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北 도발에 맞서 장렬히 산화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란 표현을 여섯 차례나 썼다.

현직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의 주체가 ‘북한’임을 규정한 것도 처음이다. 문 전 대통령은 북한 소행임을 분명하게 언급한 적이 없을뿐더러, 임기 중 다섯 차례 열린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에 세 번이나 불참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이 아니라 국군과 국민을 향해 대답해야 한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