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용기란 무엇일까
한양대 16대 총장으로 출마하면서 ‘도전’과 ‘탐험’을 자주 말했다. 그 둘은 사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어떤 울컥함이랄까 아니면 어떤 일렁임이랄까, 그런 오래되고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정제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감정은 다름 아닌 ‘용기’라는 것이었다. 많이 생각해봤다. 용기란 무엇일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무수히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드러나기 위해 사는가, 협력하기 위해 사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이기는 것이 용기인가, 져주는 것이 용기인가, 혹은 속으로 떠는 것을 들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용기라고 할 수 있는가.

회갑을 막 돈 자가 그의 이런저런 경험으로 바라본 잠정적 용기란 그렇다. 어떤 시인이 비록 동시대에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없는 척박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주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거나, 적절한 시기가 돼 잊히기를 수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용기다. 사람의 숫자를 이기기 어려운 시대다. 하지만 용기 있는 리더란 가령 100만 명이 다수결로 채택한 대수(代數)방정식 답안의 오류를 과감히 선포하고, 그 대안으로서 유능한 수학자 단 한 명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자다. 무수히 쏟아지는 당분간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만일 어떤 교수가 용기가 있다면, 이른 새벽 날의 신선함처럼 등장한 젊은 제자의 천재성을 마치 비옥한 토양을 만난 것과도 같은 축복으로 삼을 것이다. 쓸데없는 권위의 의견으로 그 토양을 황폐화하기보다 최상의 자양분으로 정성껏 가꾸고 인내로 기다려 언젠가 자신도 그 속으로 녹아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분명한 것 한 가지! ‘절연(絶緣)’만큼은 가장 용기 없는 자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이라도 형제와 친구를 찾아야 한다. 평생토록 일군 자비와 선행과 부드러움의 역사가 한낱 가식과 위선의 종잇장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공부한 게 영어고 언어인지라 오늘도 한 자락 인용하자면 ‘용기(courage)’는 심장(heart)을 뜻하는 라틴어 ‘cor-’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용기가 없다는 것은 그 심장의 중심에 박동하는 피의 용솟음이 희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럴진대 희망찬 떨림과 열정의 울림이 없어 그 삶의 지루하고 따분함을 불평한다면 이보다 더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