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길었던 줄이… > 30일 ‘리치세션’이 덮친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명품 매장이 한산하다. 코로나19 창궐 후 명품 열기가 뜨거웠던 2020년 5월 중구의 또 다른 백화점 샤넬 매장 오픈 때(아래 사진)와 비교된다.   /강은구 기자·뉴스1
< 이렇게 길었던 줄이… > 30일 ‘리치세션’이 덮친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명품 매장이 한산하다. 코로나19 창궐 후 명품 열기가 뜨거웠던 2020년 5월 중구의 또 다른 백화점 샤넬 매장 오픈 때(아래 사진)와 비교된다. /강은구 기자·뉴스1
명품의 대명사인 롤렉스, 샤넬 등 S급 중고품 가격이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포장도 뜯지 않아 사실상 신제품과 같은 취급을 받는 매물들이다.

유통업계에선 “지난해 4분기부터 가시화한 경기 둔화 국면 속에서도 씀씀이를 줄이지 않던 부자들마저 주머니를 닫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치세션(부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ich’와 불황을 의미하는 ‘recession’의 합성어)’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명품 리셀價 급락

롤렉스 리셀價 급락…부자도 지갑 닫는 '리치세션' 왔다
30일 명품업계에 따르면 롤렉스코리아는 이달부터 연간 시계 구매 한도를 1개에서 2개로 늘렸다. “비인기 제품의 재고를 줄이려는 목적”이란 게 업계의 해석이다.

롤렉스는 지난해 리셀(되팔기) 시장에서 한때 판매가격의 두 배 이상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리셀족’이 늘어난 것도 요인이지만, 본질적으론 매물을 받아주는 수요층이 탄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선 사정이 바뀌었다. 롤렉스의 ‘간판’인 ‘서브마리너 그린(스타벅스)’은 지난해 6월 3800만원대에 팔리던 게 최근 200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에만 네 차례 가격이 오른 샤넬 핸드백은 중고 명품매장에 매물이 넘쳐날 정도다. 샤넬의 대표 상품인 ‘더블 플랩백 미디움’은 지난해 12월 1400만원에서 최근 1100만원대로 하락했다.

○‘백화점 불패 신화’ 깨지나

산업통상자원부의 지난 1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유명 해외 브랜드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2% 줄어들었다. 코로나19 확산 우려가 커진 2020년 3월 이후 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2022년까지 백화점 매출 확대를 주도하던 명품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성장세가 급속도로 둔화하고 있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20% 이상 성장한 백화점 3사 명품 부문은 올해 1~2월 매출 증가율이 5.8%로 뚝 떨어졌다. 한 번에 수백만~수천만원을 써야 하는 가구·가전 등도 마찬가지다. 백화점의 가구·가전 매출은 지난 1~2월 각각 전년 동기 대비 3.9%, 3.8% 줄었다.

○씀씀이 줄이는 젊은 부자들

유통·명품업계에선 올해 들어 본격화한 리치세션의 배경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코로나19 이후 명품 소비 확대를 주도한 3040세대 ‘영앤리치’들의 주머니 사정이 악화했다는 점이다.

우수 개발자 입도선매를 위해 2020~2021년 임직원 연봉을 확 올렸던 정보기술(IT) 기업 및 스타트업들이 긴축 경영에 들어간 게 소비 둔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네이버의 경우 사업보고서상 직원 평균 연봉이 2021년 전년 대비 26.0% 급등했다가 지난해엔 4.1% 오르는 데 그쳤다.

가구·가전 등은 부동산 경기 악화로 인한 이사 수요 감소의 직격탄을 맞았다. 올해 들어 해외여행이 급증한 건 젊은 부자들이 국내 소비를 확 줄이는 핵심 요인으로 거론된다. 백화점에선 명품 수요가 쪼그라든 대신 여행용 캐리어 판매가 올해 들어 지난해보다 서너 배 급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경제 사정이 반전할 것이란 확신이 없어 부유층도 쉽사리 소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리치세션 (Richcession)

부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리치(rich)’와 불황을 의미하는 ‘리세션(recession)’을 합친 신조어. 월스트리트저널이 “불황기에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큰 고통을 받고 고소득층은 약간의 경제적 불편함을 겪는 수준에 그치지만, 올해는 부자들도 힘든 시기를 보낼 것”이라며 지난 1월 3일자에 이 단어를 사용했다.

배정철/오유림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