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참여한 남시진·윤근일·최병현 씨…"신라 고고학 기틀이자 학문 진일보 성과"
"'나와서는 안 될 천마' 발견 순간, 지금도 기억나"…6일 경주서 특별 좌담회
[천마총 발굴 50년] ② "감히 무덤을" 뚝심으로 성과 낸 발굴단…"우린 행운아"
"우리나라 정서상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은 금기잖아요.

반대도 상당했는데 그 해 한동안 가뭄도 이어져 걱정이 많았죠."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은 1973년의 그날이 생생하다는 듯 '정말 더웠다'고 떠올렸다.

경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당시 21살 청년이었다.

친척 아저씨의 소개로 불국사 복원 현장에서 일했던 그는 천마총 발굴 조사단원의 막내로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조사단은 고(故) 김정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이 단장을 맡았으며 김동현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부단장), 지건길 학예연구사, 박지명 문화재관리국 직원 등이 참여했다.

조사보조원으로 함께 이름을 올린 이들이 남 원장과 윤근일·최병현·소성옥 씨 네 사람이다.

이들의 모습은 천마총을 배경으로 한 흑백 사진 속에 환히 웃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남 원장은 발굴 50년을 앞두고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던 행운아였다"며 "20대 초반에 문화유산 현장에 귀의해 지금까지 50년을 일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천마총 발굴 50년] ② "감히 무덤을" 뚝심으로 성과 낸 발굴단…"우린 행운아"
그는 "당시 조사단원 중 유일한 경주 시민이었다.

경주 인구가 30만명 정도였는데 그중 1명으로 참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며 "누구 하나 빼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돌아봤다.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에게도 1973년은 무엇보다 특별한 해로 기억된다.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사학자인 정영호 교수의 소개로 천마총 발굴 현장에 투입된 그는 작업 일지를 작성하는 일을 도맡았다.

거의 매일 같이 쓴 일지에는 현장 상황이 생생히 담겨 있다.

윤 전 소장은 "국가가 주도해서 공식적으로 발굴조사에 나선 건 '황남동 155호 고분' 즉, 천마총이 처음이었다"며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던 만큼 정말 열심히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사용했던 카메라 모델명을 정확히 언급하며 "보고서에 실은 사진 80∼90%가 내가 촬영한 것"이라며 "'천마도'가 나왔을 때 처음으로 촬영한 것도 내 카메라여서 더욱 보람 있다"며 웃었다.

천마총은 1976년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만들면서 일반인은 물론,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온 학생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르는 관광 코스가 됐지만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마총 발굴 50년] ② "감히 무덤을" 뚝심으로 성과 낸 발굴단…"우린 행운아"
특히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4단으로 된 화려한 금관이 출토되던 순간은 지금도 회자한다.

"금관을 드러낼 때쯤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급변한 하늘의 기운에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금관을 수습해 일부 작업을 끝냈을 때는 밤하늘도 씻은 듯이 맑아져 있었다.

(1973년 7월 27일 기록)
워낙 세간의 관심이 쏠리던 발굴 현장이었던 만큼, 웃지 못할 일화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언론 유출자 찾기' 일화다.

당시에는 귀중한 유물이 나오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청와대에 보고해야 했는데, 보고 전에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단장이 단원들을 채근하기도 했다.

훗날 알려진 사실은 한 언론사 기자의 부인이 전화국 교환수였고, 통화 과정에서 보고 내용이 누설됐다는 것이었다.

남 원장은 "아무래도 경주 사람이니 나야말로 '주의 대상 1호'였다.

단장이 하루는 나를 현장에서 빼 다른 발굴 현장으로 보냈는데 그다음 날 또 특종이 나와서 혐의에서 벗어났다"며 떠올렸다.

사교성이 좋아 현장 누구와도 잘 지냈던 윤 전 소장 역시 "'미스터 윤, 저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당시 단장이) 조사단원들에게 '눈 감고 비밀 못 지킨 사람은 손 들어라'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천마총 발굴 50년] ② "감히 무덤을" 뚝심으로 성과 낸 발굴단…"우린 행운아"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이 생각하는 잊지 못할 순간은 언제일까.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천마'의 모습이 그려진 장니(障泥·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 발견 당시를 꼽았다.

최 명예교수는 "김정기 박사께서 훗날 돌아가실 때까지 '천마도 장니는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었다'고 하셨다.

당시 (보존과학 기술이나 복원 능력으로는) 나오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마총 발굴은 신라 고고학이 체계화하는 기틀이 된 계기이자 우리 학문이 진일보한 사건"이라고 봤다.

켜켜이 쌓인 세월 속에 발굴단원 모두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다.

김정기 박사, 박지명 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반세기 역사를 돌아보게 된 건 이제 남은 6명이다.

모일 때마다 1973년으로 '시간 여행' 한다는 이들은 이달 6일 경주에서 다시 모인다.

"누군가는 당시 천마총 발굴을 두고 잘했니, 못했니 이렇게 평가할 수 있겠죠.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1973년 그해, 우리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 (윤근일 전 소장)
[천마총 발굴 50년] ② "감히 무덤을" 뚝심으로 성과 낸 발굴단…"우린 행운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