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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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직서를 아버지께 들켰다. 신혼 시절 부모님과 한집에 살 때다. 입사 동기 중 하나가 불러 “입행 동기지만 난 대리다. 다른 대리들이 뭐라 한다. 존댓말을 써라”라고 했다. 아래 직급인 계장 중에서는 내가 선임이라 그동안 언행에 각별히 신경 써왔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뜻밖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선임부서의 대리 수준이 이 정도냐는 생각에 이르자 난생 처음으로 사직서를 써 양복 안 주머니에 넣었다. 비로소 진정이 돼 그날 일을 마쳤지만 여러 집을 오가며 혼자 술을 마셨다. 밤이 이슥하도록 마셔 집에 돌아온 건 열두 시가 넘어서였다.
평소 집에 돌아오면 그날 입었던 옷 주머니에 든 소지품을 모두 꺼내 놓는다. 양복은 분무기로 물을 뿌려 걸어두고 다음 날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그러나 술에 취해 안방인 줄 착각하고 소지품을 거실 탁자 위에 놓았었다. 새벽잠 없는 아버지가 거실에 나와 그 사직서를 먼저 봤던 거다. 출근하는 나를 앉히고 연유를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은행장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서를 낸다면 몰라도 겨우 대리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사표를 내냐? 사나이 배포가 그 정도면 뭔 큰일을 하겠느냐.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냐”며 나무랐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와 아내가 합석하자 아버지는 더 큰소리로 야단쳤고 말씀은 더 길어졌다. “모름지기 직장에서는 상사 만족이 우선이다. 상사는 화투 쳐서 딴 직위가 아니다. 그도 노력해서 얻은 자리다. 앉아서 볼 때와 일어서면 달리 보이듯 한 계단 높은 데서 보면 보는 게 다르다. 그걸 인정 않으려는 네가 잘못이다” 아버지는 언성을 더 높여 “승진하려면 네 상사가 차상급 직위자에게 핀잔듣지 않게 해줘야 하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주가 따로 있다. 그도 너와는 다른 재주가 있는데 그걸 인정 안 하려는 네가 문제다”라며 역정을 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각자무치(角者無齒)’다. ‘뿔이 있는 짐승은 이빨이 없다’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모든 생물은 장단점,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날카로운 뿔을 가진 동물에게 이는 필요 없다. 적과 싸울 때 뿔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이를 가진 동물 또한 뿔은 필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모든 재주를 갖출 수는 없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 성어는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나온다. 그 이전에도 한나라의 엄준(嚴遵)이 쓴 노자지귀(老子指歸)에도 나온다.
늦게 출근한 그 날부터 윗사람에게 깍듯하게 예우했다. 아버지 말씀이 큰 힘이 됐다. 진심으로 상대를 존대하니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어 이젠 버릇이 되었다. 술 마시지 않고 돌아온 그날 저녁 아버지는 다시 불러 조선 시대 고상안(高尙顔) 시인의 시 ‘관물음(觀物吟)’을 일러줬다. “소는 윗니가 없고/ 호랑이는 뿔이 없으니/ 하늘의 이치는 공평하여/ 저마다 마땅함을 주었구나/ 이것으로 벼슬길의 오르내림을 볼 때/ 오르지 못했다 개탄할 게 없고/ 쫓겨났다 슬퍼할 게 없도다.”
다른 이의 사정이나 형편을 잘 헤아려 주는 마음이 이해심(理解心)이다. 이성적인 이해력(理解力)과는 좀 다르다. 이해력이 없는 이해심은 공허하고 이해심이 없는 이해력은 무의미하다고도 한다. 남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심을 바탕으로 이해력을 높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해심 또한 서둘러 손주들에게도 깨우쳐주어야 할 중요한 인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평소 집에 돌아오면 그날 입었던 옷 주머니에 든 소지품을 모두 꺼내 놓는다. 양복은 분무기로 물을 뿌려 걸어두고 다음 날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그러나 술에 취해 안방인 줄 착각하고 소지품을 거실 탁자 위에 놓았었다. 새벽잠 없는 아버지가 거실에 나와 그 사직서를 먼저 봤던 거다. 출근하는 나를 앉히고 연유를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은행장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서를 낸다면 몰라도 겨우 대리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사표를 내냐? 사나이 배포가 그 정도면 뭔 큰일을 하겠느냐.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냐”며 나무랐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와 아내가 합석하자 아버지는 더 큰소리로 야단쳤고 말씀은 더 길어졌다. “모름지기 직장에서는 상사 만족이 우선이다. 상사는 화투 쳐서 딴 직위가 아니다. 그도 노력해서 얻은 자리다. 앉아서 볼 때와 일어서면 달리 보이듯 한 계단 높은 데서 보면 보는 게 다르다. 그걸 인정 않으려는 네가 잘못이다” 아버지는 언성을 더 높여 “승진하려면 네 상사가 차상급 직위자에게 핀잔듣지 않게 해줘야 하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주가 따로 있다. 그도 너와는 다른 재주가 있는데 그걸 인정 안 하려는 네가 문제다”라며 역정을 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각자무치(角者無齒)’다. ‘뿔이 있는 짐승은 이빨이 없다’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모든 생물은 장단점,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날카로운 뿔을 가진 동물에게 이는 필요 없다. 적과 싸울 때 뿔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이를 가진 동물 또한 뿔은 필요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모든 재주를 갖출 수는 없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 성어는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나온다. 그 이전에도 한나라의 엄준(嚴遵)이 쓴 노자지귀(老子指歸)에도 나온다.
늦게 출근한 그 날부터 윗사람에게 깍듯하게 예우했다. 아버지 말씀이 큰 힘이 됐다. 진심으로 상대를 존대하니 그렇게 마음 편할 수 없어 이젠 버릇이 되었다. 술 마시지 않고 돌아온 그날 저녁 아버지는 다시 불러 조선 시대 고상안(高尙顔) 시인의 시 ‘관물음(觀物吟)’을 일러줬다. “소는 윗니가 없고/ 호랑이는 뿔이 없으니/ 하늘의 이치는 공평하여/ 저마다 마땅함을 주었구나/ 이것으로 벼슬길의 오르내림을 볼 때/ 오르지 못했다 개탄할 게 없고/ 쫓겨났다 슬퍼할 게 없도다.”
다른 이의 사정이나 형편을 잘 헤아려 주는 마음이 이해심(理解心)이다. 이성적인 이해력(理解力)과는 좀 다르다. 이해력이 없는 이해심은 공허하고 이해심이 없는 이해력은 무의미하다고도 한다. 남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심을 바탕으로 이해력을 높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해심 또한 서둘러 손주들에게도 깨우쳐주어야 할 중요한 인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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