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04일 13:57 자본 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마켓PRO] 현정은, 2000억 배상금 어떻게…IB업계 "현대엘리 경영권 매각 가능성"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이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주주인 쉰들러와 벌인 소송에서 패소해 최대 3000억원(지연 이자 포함)의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다. 현 회장은 2심 직후 1000억원을 납부했다. 2000억원을 추가로 마련해야하는데 자금 확보 방안이 마땅치 않다.

시장에선 현대엘리베이터 사례가 주주대표소송으로 대주주가 경영권을 박탈 당한 첫 사례가 될 수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급등세를 타고 있다.

현정은 IB 소집했지만 "마땅한 방안 없어"

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현 회장은 다국적 기업 쉰들러가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지난달 30일 대법원 최종 패소한 이후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현 회장 측은 판결 직후 국내외 대형 증권사 IB 인력들을 소집해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를 짜 올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 측은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자금을 확보할 방안을 물색하고 있다. 하지만 IB 관계자들은 "경영권 매각 외 뚜렷한 방법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조달 창구가 회사가 아닌 현 회장 개인이다보니 뚜렷한 담보가 없어 PEF 등 재무적투자자(FI)를 백기사로 확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2006년 현 회장이 자신이 대주주인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금융사 5곳을 백기사로 들이면서 시작됐다. 현 회장은 우호지분 매입을 대가로 연 5.4~7.5% 수익을 보장해주는 총 10건의 파생상품계약을 체결했다. 해당 상품은 현대상선의 주가가 오르면 현대엘리베이터와 금융사가 80대 20으로 이익을 나눠갖지만, 주가가 떨어지면 회사 측이 손실분을 전액 물어주는 구조다.

문제는 계약 이후 2010년부터 해운업 불황이 장기간 이어지고 현대상선 주가가 급락하면서 불거졌다. 2011년부터 2013년간 현대엘리베이터는 금융사에 4500억원을 보상해야했고, 이로인해 회사의 당기순손실은 3656억원에 달했다.

2대 주주인 쉰들러는 2013년 현 회장 등 경영진이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현대엘리베이터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2심과 대법원은 "현 회장 등 경영진이 주가하락에 따라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만 담긴 자료를 바탕으로 해당 계약을 체결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000억 마련해야하는데…보유지분도 담보로

판결이 확정되면서 현 회장은 배상해야할 원금인 1700억원에 2014년부터 2019년까진 연 5%, 2019년부터 현재까지 연 15%에 달하는 가산이자를 더한 돈을 회사에 지급해야한다. 소송이 9년간 장기화된 점을 고려하면 배상금은 이자 포함 3000억에 육박한다. 현 회장은 2020년 2심 판결 이후 1000억원을 회사에 납부했지만 남은 원리금만도 2000억원에 달한다.

현 회장이 이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현 회장이 보유 중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7.83% 중 6.28%는 금융사와 주식담보계약을 체결 중이다. 2심 판결 후 회사에 1000억원을 미리 납부하면서 대출을 일으킨 것으로 풀이된다. 나머지 지분 1.55%를 전부 추가 담보로 제공해도 배상금 마련은 쉽지 않다. 현 회장은 코스닥 상장사인 현대무벡스 지분 21.13%도 보유 중이지만 이 주식의 18.19%도 담보로 잡혀있다. 가족들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인 현대네트워크 보유 지분(10.61%)을 활용하는 방안도 있지만 법인 자금을 현 회장 개인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경우 법적 문제에 설 수 있다.

현 회장은 납부 기한을 최대한 미룰 방안을 찾고 있지만 현대엘리베이터 이사회가 현 회장 개인에게 보상금 청구를 미루면 배임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기한을 미루는 것도 최대 1년에 그칠 것이란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상속세 등 세금이 아닌 손해배상금이기 때문에 연부연납 등도 허용되지 않는다.

현재 뚜렷한 대응을 보이지 않는 쉰들러가 지분 확보에 나서는 등 추가 공세에 나서면 방어책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일부 PEF는 현 회장의 지분을 인수하고 일부 대우를 약속하면서 공개매수로 안정적 경영권을 확보하는 '오스템임플란트' 모델 등을 검토하는 곳도 감지된다.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급등하고 있다. 이날 오후 1시48분 현재 15.40% 오른 3만56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주가는 나흘 동안 36% 가량 뛰었다.

재계에선 현 회장의 경영권 매각까지 이어질 경우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번 주주대표소송이 대주주가 경영권을 내놓게 한 국내 첫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한 경제계 관계자는 "국내에도 행동주의펀드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막대한 배상금을 대주주에 청구한 주주대표소송이 판례로 자리잡으면서 최대주주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들이 보다 엄격하게 감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