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나 다시 떠올리는 천마총…"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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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굴 주역 5명 한자리에…"유물 수습할 땐 아기 보듯 돌보기도"
대통령 방문부터 '천마도' 발견까지…"천마총 발굴은 중요한 출발점" "그때 발굴조사단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경주 시내 어디서든 외상을 할 수 있었어요, 허허. 그만큼 알려져 있었던 거죠."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1973년 경북 경주에서는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쓰던 '노란 모자'는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 발굴 현장에서 일한다는 징표였다.
현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던 문구점과 철물점, 밤늦게까지 사진을 현상해주던 사진점, 단원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종종 찾았던 다방 등 어디서나 이들의 유니폼과 작업 모자는 일종의 명함이었다.
한국 고고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황남동 155호 고분, 이른바 천마총 발굴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73년 4월 6일 위령제를 올리고 첫 삽을 뜨며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지 정확히 50년 만이다.
당시 조사단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6일 경주힐튼호텔에서 열린 특별 좌담회 '천마총, 그날의 이야기' 행사에서 "천마총 발굴은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발굴 50년을 기념하는 첫 사업인 이번 행사에는 최 명예교수, 지건길 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 소성옥 씨 등 5명이 참석했다.
고령인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사전에 촬영한 영상으로 참여했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지만, 이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천마총 발굴 현장을 기억했다.
천마총에 앞서 충남 공주 무령왕릉 발굴에도 참여했던 지건길 전 이사장은 "무령왕릉은 '졸속 발굴'로 학계나 사회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던 터라 천마총은 정말 제대로 마음먹고 발굴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찾은 날부터 '천마'가 그려진 장니(障泥·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 나온 순간까지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생했다.
김동현 전 소장은 1973년 7월 3일 대통령이 방문하던 순간과 관련, "윗부분에 천막을 치던 중 바람이 불어 현장 인부 1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던 찰나였다"고 말하며 아찔했던 순간을 전했다.
대통령이 조사단에 내린 '하사금'도 하나의 추억이었다.
지건길 전 이사장은 "그 돈으로 TV를 샀다"며 웃었고, 윤 전 소장은 "책상을 샀다"고 떠올렸다. 그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소성옥 씨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술사학자 진홍섭 박사의 소개로 조사단의 '홍일점'으로 참여했던 그는 현장에서 수습한 유물을 관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소씨는 천마도 장니 수습 당시를 언급하며 "미리 상자를 준비해두고 소독된 한지를 덮고,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 적신 탈지면을 가장자리에 둘러 이송했다"고 전했다.
일부 유물의 경우 "하루 세 번씩 (보존을 위한 약품을) 뿌리며 아기 밥 먹이듯이 돌봤다"고 회상했다.
발굴 후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맞는 만큼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정기 박사와 박지명 씨가 언급될 때 이들은 살짝 고개를 떨궜다.
김동현 전 소장이 나오는 영상에서 김정기 박사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자 소씨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지건길 전 이사장은 "이 자리에 함께 못했지만, 박지명 선생의 보고서는 정말 대단하다.
특히 4∼5개 층의 유물 출토 상태를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고서에 쓴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문화재 분야에 몸담은 이들은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아쉬운 점도 털어놨다. 최 명예교수는 출토된 전체 유물을 한데 모아놓고 찍은 사진이 없는 점을 거론하며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내려와서 '대통령에게 보여줘야 한다'며 (주요 유물을) 걷어라, 안 된다며 실랑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기 박사 등이 사표를 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그는 "과잉 충성으로 인한 행동"이라고 쓴소리를 냈다.
지 전 이사장은 "앞으로 50년이 지난 뒤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엄청난 유물이 나왔는데도 후속 연구는 아직 모자라지 않은가 싶다"고 힘줘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1973년 천마총 발굴은 어떤 의미일까.
윤 전 소장은 "천마총으로 인해서 잘 견디고 지금까지도 잘살고 있다"는 말로 함축해서 말했다.
최 명예교수 역시 "천마총 발굴은 내게는 행운이자 인생의 시작, 또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올 한해 천마총 발굴을 재조명하고 그 성과와 가치를 널리 알릴 예정이다.
다음 달 4일에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실물을 9년 만에 공개한다.
김연수 국립문화재연구원장은 "조사단원 8명이 치열하게 임했던 천마총은 우리 고고학 발굴의 한 역사가 됐다.
발굴뿐 아니라 (문화재) 보존과학을 더욱 탄탄하게 이끈 시발점이 됐다고 본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대통령 방문부터 '천마도' 발견까지…"천마총 발굴은 중요한 출발점" "그때 발굴조사단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경주 시내 어디서든 외상을 할 수 있었어요, 허허. 그만큼 알려져 있었던 거죠."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1973년 경북 경주에서는 '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쓰던 '노란 모자'는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 발굴 현장에서 일한다는 징표였다.
현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던 문구점과 철물점, 밤늦게까지 사진을 현상해주던 사진점, 단원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종종 찾았던 다방 등 어디서나 이들의 유니폼과 작업 모자는 일종의 명함이었다.
한국 고고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황남동 155호 고분, 이른바 천마총 발굴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73년 4월 6일 위령제를 올리고 첫 삽을 뜨며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지 정확히 50년 만이다.
당시 조사단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6일 경주힐튼호텔에서 열린 특별 좌담회 '천마총, 그날의 이야기' 행사에서 "천마총 발굴은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발굴 50년을 기념하는 첫 사업인 이번 행사에는 최 명예교수, 지건길 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장, 소성옥 씨 등 5명이 참석했다.
고령인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사전에 촬영한 영상으로 참여했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지만, 이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천마총 발굴 현장을 기억했다.
천마총에 앞서 충남 공주 무령왕릉 발굴에도 참여했던 지건길 전 이사장은 "무령왕릉은 '졸속 발굴'로 학계나 사회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던 터라 천마총은 정말 제대로 마음먹고 발굴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찾은 날부터 '천마'가 그려진 장니(障泥·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 나온 순간까지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생했다.
김동현 전 소장은 1973년 7월 3일 대통령이 방문하던 순간과 관련, "윗부분에 천막을 치던 중 바람이 불어 현장 인부 1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던 찰나였다"고 말하며 아찔했던 순간을 전했다.
대통령이 조사단에 내린 '하사금'도 하나의 추억이었다.
지건길 전 이사장은 "그 돈으로 TV를 샀다"며 웃었고, 윤 전 소장은 "책상을 샀다"고 떠올렸다. 그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소성옥 씨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미술사학자 진홍섭 박사의 소개로 조사단의 '홍일점'으로 참여했던 그는 현장에서 수습한 유물을 관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소씨는 천마도 장니 수습 당시를 언급하며 "미리 상자를 준비해두고 소독된 한지를 덮고,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 적신 탈지면을 가장자리에 둘러 이송했다"고 전했다.
일부 유물의 경우 "하루 세 번씩 (보존을 위한 약품을) 뿌리며 아기 밥 먹이듯이 돌봤다"고 회상했다.
발굴 후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맞는 만큼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정기 박사와 박지명 씨가 언급될 때 이들은 살짝 고개를 떨궜다.
김동현 전 소장이 나오는 영상에서 김정기 박사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자 소씨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지건길 전 이사장은 "이 자리에 함께 못했지만, 박지명 선생의 보고서는 정말 대단하다.
특히 4∼5개 층의 유물 출토 상태를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고서에 쓴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문화재 분야에 몸담은 이들은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아쉬운 점도 털어놨다. 최 명예교수는 출토된 전체 유물을 한데 모아놓고 찍은 사진이 없는 점을 거론하며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내려와서 '대통령에게 보여줘야 한다'며 (주요 유물을) 걷어라, 안 된다며 실랑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기 박사 등이 사표를 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그는 "과잉 충성으로 인한 행동"이라고 쓴소리를 냈다.
지 전 이사장은 "앞으로 50년이 지난 뒤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엄청난 유물이 나왔는데도 후속 연구는 아직 모자라지 않은가 싶다"고 힘줘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1973년 천마총 발굴은 어떤 의미일까.
윤 전 소장은 "천마총으로 인해서 잘 견디고 지금까지도 잘살고 있다"는 말로 함축해서 말했다.
최 명예교수 역시 "천마총 발굴은 내게는 행운이자 인생의 시작, 또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올 한해 천마총 발굴을 재조명하고 그 성과와 가치를 널리 알릴 예정이다.
다음 달 4일에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실물을 9년 만에 공개한다.
김연수 국립문화재연구원장은 "조사단원 8명이 치열하게 임했던 천마총은 우리 고고학 발굴의 한 역사가 됐다.
발굴뿐 아니라 (문화재) 보존과학을 더욱 탄탄하게 이끈 시발점이 됐다고 본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