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초기 한미-북 핵사찰 기싸움…'모가디슈 남북 공관원 탈출' 뒷얘기
한국과 수교한 중국, '한-대만 단교'에 기쁨 감추지 않아
1992년 외교문서 36만쪽 비밀해제…첫 북미고위급접촉 비화 공개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이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해 새로운 외교 지평을 모색하고, 북한 핵이 국제사회 이슈로 본격 부각한 1992년 외교 비사가 공개됐다.

외교부는 6일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2천361권, 36만여 쪽을 일반에 공개했다.

남북이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92년도에 생산된 문서가 중심으로, 북한과 미국의 첫 고위급 회담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 등 숨 가쁘게 돌아간 북핵 외교 단면과 한중수교를 둘러싼 주변국 반응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소련 해체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자 외교적 고립 우려에 처한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다.

또 국제사회 압력에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후 6년여 만인 1992년 1월 IAEA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핵 사찰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대미 유화전략을 구사하며 미국과 첫 고위급 회담에도 임한다.

1992년 1월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회동한 것인데, 당시 북측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역내 안정의 요소(source of stability)로 인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미국의 평가가 외교문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한미가 북미관계 개선 조건으로 요구한 별도의 '남북간 상호 사찰'에 응하지 않고,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 시설)의 존재와 이 시설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 의혹은 실체를 더하게 됐다.

다만 올해 공개된 문서에는 북미 간 오간 대화와 IAEA의 대북 핵시설 사찰 관련 내용이 상당 부분 비공개 처리돼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북방외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1992년 8월 한중수교 관련 문서들도 교섭 과정까지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막후 분위기를 살펴볼 단서들은 담고 있다.

한중 수교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대만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한중 수교가 불러올 파장에 대해 경고를 발신하고 이를 늦추기 위해 총력을 다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종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일행의 1992년 1월 대만 보고서에 따르면 이등휘 대만총통은 김 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아시아에 남아있는 공산주의 세 나라(중국·북한·베트남)는 시간문제이지 저절로 넘어질 것이 확실하므로 한국과 대륙(중국을 지칭)과의 관계 개선에 속도를 늦춰 신중히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중국은 한중수교가 실현되자 내부적으로 '한·대만 단교'를 큰 성과로 여기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고 당시 방중했던 일본 사회당 인사가 전하기도 했다.

북방외교의 '종착점'으로 꼽히는 한·베트남 수교 과정 관련 문서도 공개됐다.

미국은 한·베트남 관계 개선 움직임에 여러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정부는 미국과 베트남 관계도 급진전하는 상황에서 더는 수교를 미룰 수 없다고 보고 1992년 12월 22일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과거사 현안으로 떠오른 초창기였던 당시 한일이 주고받은 논의 내용도 일부 공개됐다.

일례로 1992년 2월 개최된 한일 과장급 업무협의에서 한국 측은 "보상 문제, 교과서 기술 문제 등 응분의 조치가 수반돼야 한다"고 촉구했고, 일본 측은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면서도 "1965년 청구권 협정을 문제 삼을 경우 한일관계의 기본 틀을 흔든다"고 우려했다.

영화 '모가디슈'(2021)로 유명해진 1991년 '소말리아 남북 공관원 탈출' 외교전문도 눈길을 끈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대사관원들이 함께 목숨을 걸고 현지에서 탈출한 과정이 생생하게 담겼다.

이밖에 1992년 4월 로스앤젤레스(LA) 폭동 당시 동포 보호지원 대책과 한미간 논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첫 방한 준비과정 등을 담은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이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1987년 외교문서도 세상에 나왔다.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 항쟁 국면에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있고, 일명 '수지 김 간첩조작사건' 당시 전문도 공개 대상에 포함됐다.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이달 말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이 구축되면 온라인으로도 원문 정보 청구·열람이 가능하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총 30차례에 걸쳐 3만5천100여 권, 약 500만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