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회복
감동할 줄 아는 한 청년이 있었다. 애절한 사랑 영화도, 살짝 과장된 성공담도 그는 있는 그대로의 눈물과 가슴 벅찬 포부로 받아들였다. 그의 지적인 친구들은 감성을 자극하는 상업주의의 결과물이니, 미담으로 승격된 다 비슷한 사람의 영웅담일 뿐이니 하며 제대로 된 이성을 갖추라고들 했지만, 그의 마음속 떨림은 언제나 여전하다고 했다. 책도 꽤 읽는 듯했는데 알고 읽는지 모르고 읽는지 동서양 고전, 종교 경전, 전공 서적 등 참 지치지도 않고 읽어대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돼 만난 학생이었다. 나는 그의 미래가 무척 궁금했다. 기대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삶의 실용적인 관점이 보이지 않아 세상을 잘 헤쳐 나갈지 걱정도 됐다. 시간은 흘렀고 수업에다 연구에 집필까지, 학교의 국제화 관련 보직으로 세계를 누비는 동안 간혹 잊을 만하면 학교를 나간 그의 소식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어렴풋이 들려왔다. 세상사란 게 정말이지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그의 인생은 순풍이 밀어주는 돛단배가 아니었다. 뭔가가 될 만하면 안 되고, 이어지는 집안의 우환에다가 아이마저도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안타까움의 감정이란 이런 느낌이란 것을 그 친구 인생을 통해 경험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반전이다! 세상사가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놀랍게도 그의 인생이 해피엔딩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내게 안타까움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거기에 들어있다는 그의 분석이다. 무엇일까? 나는 그저 가끔 이야기를 나눴고, 될 수 있으면 들어줬고, 함께 밥을 먹고 제법 긴 거리를 같이 걸어줬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용케도 나의 빈 시간을 잘 찾은 그의 성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로 인해 ‘자존감’을 찾았다고 했다.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새벽녘 어디선가 울린 음성의 명령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옛날 학생으로 그를 만났던 젊은 교수 시절의 그 생명력 넘치는 활기를 나 역시 ‘회복’하고자 했던 것도 같다. 그야말로 소위 ‘윈윈’이 됐다. 그의 웃음을 따라 나도 뿌듯하고 행복해졌으니 결국 모두가 다 잘된 것 아닌가. 한번 물어봐야겠다. 들어준 게, 걸어준 게 그렇게 컸었냐고. 그렇다면 앞으로는 주변을 향해 좀 더 대놓고 그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