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SM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싼 바이브와 카카오의 경영권 분쟁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유니버설, 소니, 워너 뮤직에 필적하는 또다른 초대형 음반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세계 음악산업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불과 20여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상전벽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아티스트와 음악이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뮤직 비즈니스계의 한복판에 서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물론 K팝의 세계화 현상은 지역을 초월하는 SNS 미디어의 탄생 즉,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국경을 넘나드는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보면 음악을 녹음해서 소개하고 팬들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는 레코드라는 매개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뮤직 비즈니스에서 레코딩은 너무나 당연시되는 과정이지만, 이 레코딩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다시 말해,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그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예술이다.

그러나 이 제약을 허문 게 레코딩이라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1877년 발명가 에디슨이 처음으로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에디슨은 처음부터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축음기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능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 위변조가 불가능한 유언을 남기거나, 연설이나 재판, 강의 등을 정확히 기록하려는 목적이 훨씬 더 컸었다.

간혹 우리들은 클래식음악이, 가요나 팝 같은 대중음악의 출발이자 시작점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가끔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다.

형식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른 팝음악 같은 대중음악이 어찌 클래식음악에서 비롯됐다는 말인가?

지금의 음악이 서양의 음악체계와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면에서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공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기원을 레코딩 산업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한편으로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추세가 대세라지만, 팝음악이 레코드라는 매체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작부터 클래식음악에 빚을 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레코딩 산업은 언제 시작된 걸까?

그걸 알아보려면,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2년 발명가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지 이미 25년이 지났지만, 축음기는 여전히 적당한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장난감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5년 전인 1897년, 에밀 베를리너라는 또다른 발명가가 자신이 고안한 ‘그라모폰’이라는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녹음·판매하려는 의도로 최초의 음반사인 ‘그라모폰사’(EMI의 전신)를 설립했다. 하지만 초기 레코딩 산업은 지독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클래식 녹음의 시대'는 엔리코 카루소에서 시작됐다
이때 등장한 가수가 바로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다.

당시 살아있던 작곡가 푸치니가 자신의 오페라 ‘라 보엠’ 캐스팅을 위해 카루소를 직접 오디션하기도 했다. 푸치니는 “누가 이 사람을 내게 보냈단 말인가? 신이 그를 보낸 것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신인이었다.

당시 그라모폰사의 1호 프로듀서였던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런던에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사실 그는 꼭 카루소와 녹음을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당시 급부상하던 두 명의 테너 중 적어도 한 명과 녹음 계약을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먼저 카루소의 공연을 보게 되었고, 카루소의 목소리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다른 대안은 생각지도 않고 곧바로 이튿날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러나 얼마 후 영국 ‘코벤트 가든’ 오페라 극장에서 중요한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던 카루소는 이 계약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이스버그가 보통 계약의 열 배가 넘는 높은 액수를 제시하자, 카루소는 결국 그라모폰사와 레코딩 계약을 맺게 된다.

1902년 4월 11일, 드디어 카루소가 머물던 밀라노 그랜드호텔로 반주자와 녹음장비를 챙겨간 가이스버그는 카루소의 호텔방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포함한 10곡의 노래를 녹음했다.

어쿠스틱 방식으로 왁스판에 녹음된 카루소의 목소리는 이후 그라모폰 레코드로 발매되었다. 이 음반들이 순식간에 팔려 나가며 엄청난 반응을 몰고왔다.

이제 노래를 들으러 극장에 가지 않고 레코드로 음악을 듣는,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면서 카루소의 레코드는 음반역사 속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 앨범으로 기록되게 된다. 여전히 녹음과 재생 기술은 열악했지만, 이후 가수들은 카루소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그들이 꺼리던 편견은 뒤로한 채 앞다퉈 레코딩을 남기게 된다.

이제 레코딩을 남기지 않은 가수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02년 카루소가 했던 녹음은 어떤 기계적인 증폭도 없이 그대로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어쿠스틱 방식이었다.

당시 주요 극장에서 노래하던 오페라 가수들이 녹음을 남겼으며, 에드바르트 그리그, 파블로 데 사라사테, 카미유 생상스,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 지금은 음악책에나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작곡가들도 녹음을 남겼다.

이후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마이크를 이용한 전기녹음이 시작되었고, 음악산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1930년대 새로운 미디어인 ‘라디오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청취자들을 위한 다양한 음악과 레코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런 대중을 위한 가수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엔리코 카루소가 클래식음악 녹음으로 처음 싹을 틔운 지 약 30여년 만에 클래식음악이 아닌, 대중을 위한 음악의 시대가 도래했다.

바야흐로 팝의 시대가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글: 이상민 (클래식음악 큐레이터)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 어쿠스틱 방식으로 녹음된 카루소의 녹음 중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한 곡 들어보자!



à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다면 à 꼬리에 꼬리를 무는 클래식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