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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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지영의 스트링
흔히 주변에서 바이올린을 켜다, 치다, 연주한다 등 다양한 동사적 표현을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어떤 표현이 적절한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사전적 의미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바이올린을 켜다, 치다 그 어느 쪽도 괜찮다. 하지만 ‘연주한다’라는 표현만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바이올린은 4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현악기다. 베이스, 첼로, 비올라보다 작아 현악기군에서 가장 작은 크기와 높은 음역대를 내는 악기이다.
작은 크기 때문인지, 높은 음역대 때문인지, 바이올린은 극도의 예민한 악기로 여겨진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매우 작은 차이로 음정과 음색이 결정된다. 찰나의 오판이 목적과는 전혀 다른 소리의 결과를 초래할만큼 민감한 악기이다.
이 작은 악기를 켜는 (또는 치는) 행위는 너무나도 오묘하다. 손가락의 무게와 간격, 관절 하나하나를 조절하고, 손끝 0.1mm 길이로 만들어 내는 차이는 무궁무진하다. 한번이라도 같은 소리를 내 줄 때가 없다. 조금 전 연습했던 소리가 마음에 들어 다시 시도해보면 절대 그 소리를 똑같이 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수백 번 같은 음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이 이상으로 여는 지점까지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갑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희열감을 느끼게도 한다.
극한의 인내와 고통이 동반되는 연습의 시간을 인고의 시간이라고도 말한다. 암흑 속을 더듬으며 한 줄기 빛을 찾는 심정으로 연습을 마치고 나면 매번 무언가라도 터득하는 배움이 있다. 그날의 연습이 난항을 겪을지언정 결국 그 몇 시간의 연습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무대 위에서의 수만 가지 상황에 대응할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얻게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소득이다.
앞서 말한 이야기가 ‘연습’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행위는 조금 다른 논리라고 생각한다.
가끔 주변에서 “무대에 오르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떤 표정이나 자세를 취한 것이 의도된 연출이냐” 등 정작 본인은 크게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답은 모두 “모른다” 이다.
연습의 과정은 그야말로 초 단위보다 치밀하게 이뤄진다. 뚜렷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로 촘촘하게 구성된 잘 짜여진 구조이다.
그런 물리적인 연습에서 얼추 자유로워질 때 나의 영감과 음악적 아이디어를 그제서야 무리 없이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런 시도와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경험한 후 완벽한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관객들이 듣는 ‘연주’로 태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무대라는 공간은 나의 영혼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연주를 시작하면 모든 감각들이 몇 배는 더 민감해져 평소에는 경험하지 못한 감정에 몰입되곤 한다. 그럴 땐 내면에 다른 자아를 마주한 것만 같을 때도 있다.
수도 없이 연습했던 것들은 거의 반자동으로 근육과 관절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실행된다. 감정은 나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노래한다.
그래서 연주 전에는 심신을 잘 정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신체 컨디션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땐 말처럼 단순하진 않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바로 잡으려 노력한다.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는 과정을 겪으며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한 가지는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직업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실력이나 음악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적·신체적 노동에 가까운 수많은 시간의 연습, 무대에 오르기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 관리, 그렇게 갈고닦은 것을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단 몇십 분 만에 모두 불사르는 이 행위는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바이올린 연주한다”라는 말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나에게 ‘연주’는 동사적 의미를 넘어 진심으로 경건해지는 그러한 것이다.
사전적 의미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바이올린을 켜다, 치다 그 어느 쪽도 괜찮다. 하지만 ‘연주한다’라는 표현만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바이올린은 4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현악기다. 베이스, 첼로, 비올라보다 작아 현악기군에서 가장 작은 크기와 높은 음역대를 내는 악기이다.
작은 크기 때문인지, 높은 음역대 때문인지, 바이올린은 극도의 예민한 악기로 여겨진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매우 작은 차이로 음정과 음색이 결정된다. 찰나의 오판이 목적과는 전혀 다른 소리의 결과를 초래할만큼 민감한 악기이다.
이 작은 악기를 켜는 (또는 치는) 행위는 너무나도 오묘하다. 손가락의 무게와 간격, 관절 하나하나를 조절하고, 손끝 0.1mm 길이로 만들어 내는 차이는 무궁무진하다. 한번이라도 같은 소리를 내 줄 때가 없다. 조금 전 연습했던 소리가 마음에 들어 다시 시도해보면 절대 그 소리를 똑같이 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수백 번 같은 음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이 이상으로 여는 지점까지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갑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희열감을 느끼게도 한다.
극한의 인내와 고통이 동반되는 연습의 시간을 인고의 시간이라고도 말한다. 암흑 속을 더듬으며 한 줄기 빛을 찾는 심정으로 연습을 마치고 나면 매번 무언가라도 터득하는 배움이 있다. 그날의 연습이 난항을 겪을지언정 결국 그 몇 시간의 연습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무대 위에서의 수만 가지 상황에 대응할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얻게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소득이다.
앞서 말한 이야기가 ‘연습’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행위는 조금 다른 논리라고 생각한다.
가끔 주변에서 “무대에 오르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떤 표정이나 자세를 취한 것이 의도된 연출이냐” 등 정작 본인은 크게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답은 모두 “모른다” 이다.
연습의 과정은 그야말로 초 단위보다 치밀하게 이뤄진다. 뚜렷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로 촘촘하게 구성된 잘 짜여진 구조이다.
그런 물리적인 연습에서 얼추 자유로워질 때 나의 영감과 음악적 아이디어를 그제서야 무리 없이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런 시도와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경험한 후 완벽한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관객들이 듣는 ‘연주’로 태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무대라는 공간은 나의 영혼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연주를 시작하면 모든 감각들이 몇 배는 더 민감해져 평소에는 경험하지 못한 감정에 몰입되곤 한다. 그럴 땐 내면에 다른 자아를 마주한 것만 같을 때도 있다.
수도 없이 연습했던 것들은 거의 반자동으로 근육과 관절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실행된다. 감정은 나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노래한다.
그래서 연주 전에는 심신을 잘 정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신체 컨디션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땐 말처럼 단순하진 않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바로 잡으려 노력한다.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는 과정을 겪으며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한 가지는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직업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실력이나 음악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적·신체적 노동에 가까운 수많은 시간의 연습, 무대에 오르기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 관리, 그렇게 갈고닦은 것을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단 몇십 분 만에 모두 불사르는 이 행위는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바이올린 연주한다”라는 말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나에게 ‘연주’는 동사적 의미를 넘어 진심으로 경건해지는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