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탈자에 결함 투성이인데…'처음 나온 책'만 모으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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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내가 '처음 나온 책'만 모으는 이유
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출판사였다. 책 만드는 일이란 게 사실은 전공 때문에 선택한 호구지책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과 나는 천생연분임을 깨닫고 편집자로서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는 출판산업 또한 호황기라서 책이 제법 팔렸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내가 편집을 맡았던 책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혹시나 내가 만든 책이 벌써 헌책방에 나오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러워 청계천 헌책방들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때 거기서 초판본과 창간호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수많은 지식인 대중을 독자로 두고도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발견하고는 설렜던 순간이 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첫 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공감하면서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에 나도 모르게 애정이 갔다.
내가 편집자로서 느꼈던 심정 또한 첫 책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말 꼼꼼히 교정과 교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인쇄되어 나오고 나면 오‧탈자라든가 제작상의 결함이 나타나곤 했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느끼는 일종의 실망감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초판본이나 창간호에는 그런 사소하거나 중대한 오류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순수한 매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나 할까. 그런 오류도 ‘하나의 역사이자 추억’이 아닐까 싶었다. 예컨대, 작가 최인훈 선생은 대표작 <광장>에 녹아 있는 역사적 오류 등을 고치려고 열 번 넘게 작품을 개정했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고 그 시작은 초판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도 책을 모아야겠다는 집념을 충동질했다. 나와 같은 50대 후반 또는 60대 이상 연령대의 국민이라면 모두 동의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책 말고는 딱히 즐길 만한 매체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조차 마땅치 않아 교과서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강화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틈날 때마다 강화도 마니산 아랫동네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던 작은집에 가서 마당이나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책더미를 파헤치며 책을 골라 읽곤 했었다. 이후 이곳저곳 출판사를 옮겨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출판사와 저자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저작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석‧박사 과정 공부를 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하면서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는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모았다. 강의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배낭을 둘러메고 학교 주변 헌책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책을 모으는 일 못지않게 책을 보관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모은 책을 보관할 공간이 점차 부족해지고 있었다. 학회 사무실, 출판사 창고, 친구 사무실까지 여러 곳을 빌려 책을 보관했는데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책 모으는 일에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존재는 세명대학교였다. 2001년 3월, 세명대학교에 신설된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출판학 전공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수도권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드넓은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세월이 흐른 2022년 3월, 청풍명월의 고장 충북 제천의 세명대 인근 건물을 임대해 국내 유일의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을 표방한 ‘처음책방’의 문을 열었다. 나의 생애 후반기 소망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고, 내가 처음 나온 책만 모은 이유 또한 분명해졌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꾸준함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오랜시간 한 권 두 권 꾸준히 모은 책이 산더미가 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스스로에게 재앙 아닌 재앙이 될 뻔했다. 하지만 결국엔 ‘처음책방’이라는 고마운 존재로 거듭났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는 신념을 유지할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처음책방’은 이제 나의 아지트 겸 놀이터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당시에는 출판산업 또한 호황기라서 책이 제법 팔렸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내가 편집을 맡았던 책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혹시나 내가 만든 책이 벌써 헌책방에 나오지는 않았을까 염려스러워 청계천 헌책방들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때 거기서 초판본과 창간호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수많은 지식인 대중을 독자로 두고도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발견하고는 설렜던 순간이 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첫 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공감하면서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에 나도 모르게 애정이 갔다.
내가 편집자로서 느꼈던 심정 또한 첫 책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말 꼼꼼히 교정과 교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인쇄되어 나오고 나면 오‧탈자라든가 제작상의 결함이 나타나곤 했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느끼는 일종의 실망감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초판본이나 창간호에는 그런 사소하거나 중대한 오류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순수한 매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나 할까. 그런 오류도 ‘하나의 역사이자 추억’이 아닐까 싶었다. 예컨대, 작가 최인훈 선생은 대표작 <광장>에 녹아 있는 역사적 오류 등을 고치려고 열 번 넘게 작품을 개정했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고 그 시작은 초판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도 책을 모아야겠다는 집념을 충동질했다. 나와 같은 50대 후반 또는 60대 이상 연령대의 국민이라면 모두 동의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책 말고는 딱히 즐길 만한 매체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조차 마땅치 않아 교과서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강화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틈날 때마다 강화도 마니산 아랫동네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던 작은집에 가서 마당이나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책더미를 파헤치며 책을 골라 읽곤 했었다. 이후 이곳저곳 출판사를 옮겨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출판사와 저자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저작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석‧박사 과정 공부를 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하면서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는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모았다. 강의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배낭을 둘러메고 학교 주변 헌책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책을 모으는 일 못지않게 책을 보관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모은 책을 보관할 공간이 점차 부족해지고 있었다. 학회 사무실, 출판사 창고, 친구 사무실까지 여러 곳을 빌려 책을 보관했는데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책 모으는 일에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존재는 세명대학교였다. 2001년 3월, 세명대학교에 신설된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출판학 전공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수도권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드넓은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세월이 흐른 2022년 3월, 청풍명월의 고장 충북 제천의 세명대 인근 건물을 임대해 국내 유일의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을 표방한 ‘처음책방’의 문을 열었다. 나의 생애 후반기 소망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고, 내가 처음 나온 책만 모은 이유 또한 분명해졌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꾸준함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오랜시간 한 권 두 권 꾸준히 모은 책이 산더미가 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스스로에게 재앙 아닌 재앙이 될 뻔했다. 하지만 결국엔 ‘처음책방’이라는 고마운 존재로 거듭났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는 신념을 유지할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처음책방’은 이제 나의 아지트 겸 놀이터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