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어진 골반' 큐피드가 소아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였다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그림으로 보는 의학코드 - 카라바조의 <잠든 큐피드>의 의미
화살촉이 가득 찬 화살통을 베개 삼아 누워 잠든 남자아이가 있다.
자는 와중에도 왼손에는 화살촉 하나와 활을 그러쥐고 있는데, 활은 팽팽해야 할 줄이 끊어져 쓸모가 없어진 상태이다.
아이의 등에서부터 한 쌍의 날개가 뻗어 나와 왼쪽 날개는 몸 아래 깔고 누웠고, 오른쪽 날개는 잠결에 반쯤 펴지다 만 것이 어둠 속에 어슴푸레 보인다.
아이의 정체는 그러니 인간이 아닌 사랑의 소년신, 큐피드이다.
카라바조는 말타 섬에서 지내던 시기, 그곳의 고위직 관료이자 수사였던 프라 프란체스코 델란텔라로부터 수주를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육체적 사랑과 열정을 관장하는 소년신이 사랑의 열병을 가져오게 할 활을 망가뜨린 채 잠든 모습은 수사가 지켜야할 순결 서약을 상기시키기 위한 도상으로 해석해볼 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그려진 소년이 신의 모습이라 하기엔 이상화된 형태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608, <잠든 큐피드>, 캔버스에 유화, 72cm×105c, 피렌체 팔라초 피티 소장
어색하게 꺾인 목과 사지 관절, 비틀어진 골반, 발달하지 못하고 패인 형태의 가슴과 그에 대조되는 팽팽히 부푼 복부, 마른 몸과 달리 부종이 생긴 듯한 얼굴, 왼쪽 손목의 커다란 혹 등에서 완전무결한 신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몇몇 학자는 이 작품을 큐피드가 죽음에 이른 모습으로 읽기도 하고, 내과의 카를로스 에스피넬 박사는 소아 류마티스 관절염을 묘사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아 류마티스 관절염(Juvenile rheumatoid arthritis)은 하나의 질환이라기보다는 만성 염증성 관절염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다. 성인의 류마티스 관절염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소아기’라는 단어를 붙여서 구분한다.
질환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성인과 달리 손가락 마디와 같은 작은 관절보다는 무릎, 발목과 같은 큰 관절에 대한 침범이 흔하게 나타난다.
이 질환은 관절이 뻣뻣해지고 통증이 있어 언어로 이를 표현하기 어려운 유아기에는 통증을 피하는 자세를 취하여 절뚝거리거나 움직이지 않으려 할 수 있다. 턱관절에 관절염이 발생하면 입을 잘 열지 못하여 귀에 통증이 동반될 수도 있다.
간과 비장, 임파선이 다발적으로 붓는 경우도 있고, 드물지만 심낭염, 혈관염이 동반될 수도 있다. 또한 안과 질환인 포도막염을 방치할 경우 실명에 이를 위험이 있다.
이 질환을 앓 아이들은 성장 장애를 겪기도 해 전체적으로 키가 작거나, 국소적인 성장 장애로 인해 턱이 작아지는 소악증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고려할 때 에스피넬 박사가 의학전문지 란셋(The Lancet)에 발표한 논문은 상당한 신빙성을 갖는다.
그는 우선 왼팔꿈치, 손가락, 왼손목, 무릎 등 여러 부위의 관절에서 부종이 보인다는 점에서 다발성 관절염 소견을, 얼굴의 부종에선 측두하악 관절염을, 턱이 짧고 안으로 들어간 무턱 형태에선 하악왜소증을 의심한다.
여기에 오른손 손가락이 유난히 짧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것을 함께 고려하면 말단부위서 성장 장애의 양상을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왼손목의 커다란 혹은 활액낭종이 생긴 상태로 추정한다. 짧은 허벅지를 가진 점과 왼다리 위로 오른 허벅지가 뻣뻣이 얹혀진 모양새로 보아 병증으로 인한 불편을 내재화한 자세로 예측했다.
이어 푹 꺼진 가슴 모양은 만성적 근육위축 및 심장 기형의 양상으로 본다. 특히 후자는 푸른빛 도는 안료를 귀와 입술에 사용한 점에서 청색증의 묘사라면 의학적으로 뒷받침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부의 노란 톤은 간 부전으로 인한 황달 증세로, 부푼 배와 튀어나온 배꼽은 간과 비장이 비대해진 결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왼쪽 귓바퀴에 접힌 모양이 보이는데, 이는 관절염의 심각한 합병증인 전신 괴사성 혈관염의 양상이라 본다.
이를 종합할 때 카라바조가 그린 큐피드의 모델은 소아 류마티스성 관절염 환자라는 것이다.
왜 큐피드를 아픈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카라바조의 잠든 큐피드를 의학적으로 살펴보고 나면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글의 초반에 언급했듯, 후원자를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순결 서약의 상기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적 사랑의 추함을 보여줄 알레고리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한편, 잠든 큐피드라는 도상은 이 그림이 그려지기 100여 년 전 르네상스 시기 인기 주제였고, 그것은 다시 그리스·로마 고전에서의 유행 도상을 되살린 결과였다. 다만 시기 별로 그 의미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르네상스 시기 미켈란젤로가 잠든 큐피드 조각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카라바조는 특히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아 깊이 탐구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작품은 사랑에 빠져 날뛰게 하는 화살, 또는 싫어서 힘껏 도망치게 하는 화살을 쓰는 장난꾸러기 큐피드의 농간이 멈춘 때에나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가졌다.
로마제국 시기에는 잠든 큐피드를 잠의 신 히프노스와 종종 치환해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주로 망자의 평안한 휴식을 상징하는 무덤 장식 조각이었다.
카라바조는 도상의 역사적 의미 변천사를 연구하며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는 재치와 지혜를 발휘한 듯 하다.
감성이 잠들면 이성이, 이성이 잠들면 감성이 깨어난다.
육신의 일시적 죽음(잠)은 어린 몸으로 견디기 힘든 혹독한 질병의 고통을 가진 큐피드가 육신의 통증을 잊고 편안히 휴식하게 한다.
또한 이 휴식은 이성과 지성을 깨어나게 해 정신적 고취를 일으킬 것이다.
이 메시지가 큐피드의 모델이었을 소년에게, 그리고 고위직 관료란 세속의 직책을 가진 신성직 수사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카라바조는 이성과 감성, 삶의 환희와 병환의 고통이라는 양극단이 서로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순환고리를 맺고 있음을 이해한 게 아닐까. 그리고는 잠든 큐피드 도상에 병증을 묘사함으로써 이를 회화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그 의의를 더듬어 헤아려보게 된다.
오범조 서울보라매병원 부교수·오경은 상명대 계양교육원 미술사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