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달항아리, 조선에서 '美' 아닌 '일상용기'로 쓰인 이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이보름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유물들 -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 개인소장, 1703~1708년, 높이 38cm, 지름 41cm
여기 품이 넉넉한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있다. 중앙에는 위 아래를 이어 붙인 자국이 남았다.
낮지만 일자로 뻗은 굽 다리의 모양과 달리 구연부는 여러 번 깎고 다듬어 밖으로 살짝 벌렸다. 유백색이라고 하는 우유 빛깔 같은 따듯한 흰 색 피부에는 세월이 남긴 자연스러운 흠결이 보인다.
이 항아리는 귀하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자체가 수량이 많지 않아 다 귀하지만, 이 항아리는 더 귀하다.
이유는 한 때 ‘민가에서 쓰던 의 간장 항아리’라는 오해도 받았던, 우리 도자 역사의 미스터리인 이 둥근 항아리를 어디에 쓰려고 만들었는지 알려주는 단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단서는 어디에 있을까? 항아리를 뒤집어 보자. 굽 주변에 ‘연령군겻쥬방’이라 쪼아서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바로 그 단서다.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 개인소장, 1703~1708년, 높이 38cm, 지름 41cm
이런걸 명문(銘文)이라고 한다. 이렇게 명문이 있는 달항아리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두 점뿐인데, 일본에 있는 다른 하나1) 보다 이 항아리가 더 크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명문의 주인공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은 숙종의 막내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동생인데,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대군으로 봉해진 것은 1703년이고 출궁은 1708년이니, 이 작품은 1703년부터 1708년 사이 연령군의 처소에서 사용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만들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연향과 의례 등의 행사를 위해서 항아리가 많이 필요했다. 그 중 행사에 꼭 필요한 기물들은 의궤에 도설(圖說)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의궤에 달항아리 모양 도자기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입호라고 불리는 어깨가 넓고 밑이 좁은 항아리 ‘준(遵)’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아마 달항아리는 행사에 올려지는 의례기는 아니고,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컨대, 왕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꿀이나 기름을 담는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연령군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달콤한 꿀일까, 처소를 반짝일 기름일까? 우리 눈엔 달항아리가 더 예뻐 보이는데 왜 이것은 저장을 위한 실용기로 쓰이고, ‘준’은 의례기가 되었을까.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들기 더 쉬워서다. 달항아리 뿐만 아니라 큰 항아리를 만들 때는 어차피 위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다.
생각해보면 서로 모양이 다른 두 개를 붙이는 것 보다는 모양이 같은 대접 두 개를 붙이는 것이 당연히 더 쉽다. 그리고 밑이 좁고 키가 큰 항아리 보다는 아래가 넓은 둥근 항아리가 가마 속 불길을 견디기에 유리하다. 결과물을 볼 때도, 둥근 항아리 쪽이 중심축이 조금 기우는 것만 눈감으면, 최종 생존율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완성품이 적은 ‘준’들은 의례 때 쓰기도 모자라니 차선책으로 이런 둥근 항아리들이 저장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달항아리를 감상할 때 유용하게 쓰일 꿀팁 하나 드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포인트는 도자기의 구연부이다. 통상적으로 구연부가 일직선으로 똑바로 서있으면 1750년대 이후, 그 높이가 높을수록 더 늦은 시기인 1800년대 초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글의 주인공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처럼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져있고 여러 번 다듬은 흔적이 보이면 1700년대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한다.
신비로운 달항아리의 나이를 도움없이 누구보다 빨리, 쉽게 캐치할 수 있는 거의 확실한 방법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기 품이 넉넉한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있다. 중앙에는 위 아래를 이어 붙인 자국이 남았다.
낮지만 일자로 뻗은 굽 다리의 모양과 달리 구연부는 여러 번 깎고 다듬어 밖으로 살짝 벌렸다. 유백색이라고 하는 우유 빛깔 같은 따듯한 흰 색 피부에는 세월이 남긴 자연스러운 흠결이 보인다.
이 항아리는 귀하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자체가 수량이 많지 않아 다 귀하지만, 이 항아리는 더 귀하다.
이유는 한 때 ‘민가에서 쓰던 의 간장 항아리’라는 오해도 받았던, 우리 도자 역사의 미스터리인 이 둥근 항아리를 어디에 쓰려고 만들었는지 알려주는 단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단서는 어디에 있을까? 항아리를 뒤집어 보자. 굽 주변에 ‘연령군겻쥬방’이라 쪼아서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바로 그 단서다.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 개인소장, 1703~1708년, 높이 38cm, 지름 41cm
이런걸 명문(銘文)이라고 한다. 이렇게 명문이 있는 달항아리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두 점뿐인데, 일본에 있는 다른 하나1) 보다 이 항아리가 더 크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명문의 주인공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은 숙종의 막내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동생인데,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대군으로 봉해진 것은 1703년이고 출궁은 1708년이니, 이 작품은 1703년부터 1708년 사이 연령군의 처소에서 사용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만들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연향과 의례 등의 행사를 위해서 항아리가 많이 필요했다. 그 중 행사에 꼭 필요한 기물들은 의궤에 도설(圖說)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의궤에 달항아리 모양 도자기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입호라고 불리는 어깨가 넓고 밑이 좁은 항아리 ‘준(遵)’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아마 달항아리는 행사에 올려지는 의례기는 아니고,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컨대, 왕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꿀이나 기름을 담는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연령군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달콤한 꿀일까, 처소를 반짝일 기름일까? 우리 눈엔 달항아리가 더 예뻐 보이는데 왜 이것은 저장을 위한 실용기로 쓰이고, ‘준’은 의례기가 되었을까.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들기 더 쉬워서다. 달항아리 뿐만 아니라 큰 항아리를 만들 때는 어차피 위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인다.
생각해보면 서로 모양이 다른 두 개를 붙이는 것 보다는 모양이 같은 대접 두 개를 붙이는 것이 당연히 더 쉽다. 그리고 밑이 좁고 키가 큰 항아리 보다는 아래가 넓은 둥근 항아리가 가마 속 불길을 견디기에 유리하다. 결과물을 볼 때도, 둥근 항아리 쪽이 중심축이 조금 기우는 것만 눈감으면, 최종 생존율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완성품이 적은 ‘준’들은 의례 때 쓰기도 모자라니 차선책으로 이런 둥근 항아리들이 저장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마지막으로 달항아리를 감상할 때 유용하게 쓰일 꿀팁 하나 드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포인트는 도자기의 구연부이다. 통상적으로 구연부가 일직선으로 똑바로 서있으면 1750년대 이후, 그 높이가 높을수록 더 늦은 시기인 1800년대 초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글의 주인공 <‘연령군겻쥬방’ 명 백자 달항아리>처럼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져있고 여러 번 다듬은 흔적이 보이면 1700년대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한다.
신비로운 달항아리의 나이를 도움없이 누구보다 빨리, 쉽게 캐치할 수 있는 거의 확실한 방법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