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공감 연습> (문학과지성사, 2019)
“여러분의 글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결혼도 하지 말고, 아이도 두지 말고, 무엇보다도 죽지 마세요. 정 죽어야 한다면 자살하세요. 저들도 자살은 괜찮다고 여기니까요.”⑴어슐러 K. 르 귄은 1986년 열린 ‘2000년도의 여자들’에 대한 컨퍼런스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로부터 몇 년 뒤 아베체데(ABCD)도 모르고 들어간 대학 강의실에서 “독일 작가나 독문학자 글 중에 읽어본 거 있는 사람?”이라고 물은 교수가 우리의 무응답을 지루해하는 기색에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댔다가 면박을 당한 적이 있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지었던 표정은 물론, 했던 말도 기억난다. “아직도 전혜린을 읽는다고? 언제 적 전혜린이냐…… 지겹지도 않냐.” 그는 전혜린보다 더 많이 언급되고 더 오래 회자된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저자는 고백한다. “나는 여성의 고통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나는 아파하는 여성이 하나의 클리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수많은 여성이 여전히 아파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는 여성의 상처란 낡아버린 것이라는 명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주장에 내가 상처받는 기분이니까.”⑵
당연하다. 공동의 상처는 시대 안에서 축적되더라도 개인들의 상처는 언제나 그만의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중이며 결코 낡는 법이 없으니까. '여성 고통의 대통일 이론'이라는 제목의 이 에세이는 <공감 연습>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왜 어떤 이야기는 아무리 반복돼도 거듭나고 또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서사의 중심이 되고, 다른 이야기는 해묵고 물려서 그만 좀 들었으면 싶은 타령이 될까? 이 책은 공감하는 법을 말하기보다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인지를 이야기한다. 이해하고 이해받기, 서로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가능성을 교환하기가 얼마나 도전적인 과제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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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온갖 붕괴와 고통과 상처에 대한 공감 연습의 막바지에 앞의 글을 배치했다는 점, 이 책의 원제가 'The Empathy Exams'이라는 점은 우리가 공감하지 않으려는 것 앞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공감 중단을 지성의 피로로 가장하기는 쉽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용기가 있기에 공감할 수도 있다. 그 점이 핵심이다.” ⑶
⑴ 어슐러 K. 르 귄, <세상 끝에서 춤추다>,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21, pp. 312-313.
⑵ 레슬리 제이미슨, <공감 연습>, 오숙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p.329.
⑶ 위의 책, pp. 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