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느강 31번 가판대, 그곳엔 젊은 작가들의 영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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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이혜원의 파리통신 - 센느강의 라부아트31 프로젝트
파리의 센느강을 따라 줄지어 설치된 초록색 철물 가판들에는 주로 빅토르 휴고의 레미제라블, 기 드 모파상 등의 유명한 작가들의 중고서적들이나 툴루즈 로트렉의 물랑루즈,이 가판들은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올법한 클리셰로 여겨지며, 프랑스인보다는 주로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공간이다.
le chat noir (검은 고양이) 일러스트 등이 엽서나 포스터 크기로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부분 닫혀있기 일쑤다. 비 등 날씨에 취약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잘 활용되지 못하는 조금은 아쉬운 설치물이다.
Laboite31 프로젝트는 이런 점을 주목해서 만들어졌다.
센느강을 따라 설치된 수많은 초록 가판들 중, 퐁뇌프 다리와 파리 보자르 그 중간 즈음에 위치한 31번 가판대는, 파리 아르데코 졸업생 이브 바흘렛이 주관하는 폴베통의 협업 프로젝트로 꼼 데 레자르 오 솔레이(햇볕의 도마뱀처럼)이라는 이름의 임시 독립출판 서점으로 탈바꿈했다.
여름에 일주일, 혹은 열흘 남짓동안 열리는 이 작은 공간에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의 시, 소설, 일러스트, 사진, 판화, 독립만화 출판물, 작은 포맷의 조각 작업까지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작가들은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아카이브를 위해 헨느 보자르 미술관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작업물을 기부하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출판물에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작은 서점은 자신의 생각과 정체성을 녹여 텍스트에 담는 것을 현대 미술의 다양한 표현 방법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관람객이 되어 이 열린 공간에서의 작고 납작한 형태의 현대미술을 감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출판물들 중에서도 그 형태, 주제, 인쇄 방법, 페이지 안에서의 레이아웃에도 각각의 다름과 색다른 시도가 있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작가가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영상통화를 하는 사진과 채팅을 담아 구성한 핸드폰 모양의 책. 음악과 글귀들이 들어 있는 카세트. 문방구나 슈퍼에서 팔 것 같은 장남감처럼 축소된 상징성을 가진 오브제가 쌓여있는 투명 플라스틱.
의미를 곱씹어 볼만한 문구들이 광고처럼 가볍게 적혀있는 포장을 두른, 조각이라고 봐야할지 책이라고 봐야할지 경계가 모호한 제품. 이것들을 보노라면 우리가 ‘책’에게 부여하고 있었던 고정관념들이 푸스스 사라진다. 그 외에도 이 작은 서점의 시스템은 좀 귀엽다. 공간대여 이외에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한 비용들은 참여자들의 노동력으로 메꿔진다.
때문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돌아가며 이 작은 서점을 지키며 때로는 타인의 작업을 설명하는 도슨트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잔돈을 거슬러 건네는 충실한 판매원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공간에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소개하기도 한다.
매우 바빠보이지는 않는다. 작가들이 여기 저기 자리를 옮기며 역할을 바꿔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에서는 이곳 특유의 유연함이 배어난다. 흔한 전시공간에서 볼 수 있는 전시공간 점원이나 작가의 딱딱한 모습과 달리 친근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시스템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정해진 틀 없이 직업을 여러개 갖거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 프로젝트를 주관한 이브 바흘렛은 파리의 외곽 몽트허이에 있는 레지던시 농-에투알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시를 주관하는 큐레이터이자 작가로, 젊은 작가들이 돈을 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프랑스에는 다양한 규모의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린다.
하지만 늘 갤러리에서 열리는 하얀 벽의 깔끔한 공간만은 아니다. 다리 밑 철골과 주변 설치물들에 미묘한 조화를 이루며 전시된 작품들을 배를 타고 전시를 보기도 하며, 개신교 교회의 마당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들이 있고, 소규모 공연장의 창고와 바, 대기실이 24시간 내지 48시간동안만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예술을 접하는 공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지는 전시와 프로젝트들은 우리에게 작품 뿐만 아니라 세상을 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