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사진=뉴스1
“처음엔 무슨 과일 수급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알고 나니 온몸이 섬뜩해지더라구요”

세종시 한 부처에서 근무하는 A과장은 최근 소속과 사무관이 작성한 보고서 파일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파일명 끝엔 ‘과수원’이라는 정체 모를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또 다른 사무관의 보고서엔 ‘국수원’이라는 파일명이 입력돼 있었다. A과장이 직접 사무관들을 불러 확인한 결과 ‘과수원’은 ‘과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했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수원은 ‘국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했다는 뜻.

과장이 두 차례에 걸쳐 수정을 지시했으면 ‘과수투’로 파일명을 바꾼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국장이 재차 수정을 지시했으면 ‘국수투’로 파일명을 바꾼다고 했다. 보고서를 기안하는 실무 사무관들이 누구가 정확하게 수정 지시를 몇 번 내렸는지를 파일명에 적어놓는 것이다.

‘과수원·국수원’ 보고서는 A부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세종시에 있는 주요 부처에선 이름은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보고서 파일명을 입력해 놓는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최근엔 ‘실수’ 보고서도 등장했다. ‘실장이 수정을 지시한’ 보고서라는 뜻이다.

상당수 사무관은 보고서를 기안할 때 이런 파일명을 삭제하지만, 일부 사무관들은 대놓고 ‘과수원·국수원’ 파일명이 적힌 보고서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국·과장들은 사무관들의 이런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B부처 국장은 “국·과장 등 상급자들이 보고서 수정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업무절차”라고 분개했다.

사무관들도 할 말은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월성 원전 자료를 삭제했던 것 관련 실무 공무원들이 검찰에 불려가는 것을 보고 충격이 작지 않았다고 했다. ‘윗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겪는 것을 보고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것이 사무관들의 설명이다. 일부 사무관들은 몰래 휴대폰을 사용해 회의를 녹음하는 사례도 종종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권이 바뀌었을 경우 이전 정부가 추진한 주요 정책 관련 보고서를 기안했다가 본인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깔려 있다고 했다. 한 부처의 사무관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첫 기안자의 뜻과 상관없이 보고서가 바뀌었을 경우 누구의 뜻인지 명확하게 밝혀놓기 위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향후 검찰이 부처를 압수수색했을 때 보고서만 보고도 누구 지시였는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나온다.

‘과수원·국수원’ 보고서가 부처에서 확산하는 현상은 공무원들이 향후 논란을 빚을 수 있는 주요 국정 현안에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질 만한 일을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의 일환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부처 관계자는 “국정과제를 수행했다는 것만으로 처벌받는다면 어떤 공무원이 일하려고 하겠냐”며 “공직사회의 복지부동 분위기가 연쇄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강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