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쌀에 米쳤다"…발렌시아로 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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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의 푸드로드
스페인 발렌시아·한국 米식투어
스페인 발렌시아·한국 米식투어
작년 9월의 일이다. 스페인 지중해의 관문 항구도시 발렌시아는 아직 여름의 한가운데처럼 뜨거웠다. 스페인 사람들이 느끼는 발렌시아의 이미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산에 대한 느낌과 비슷하다. 발렌시아는 지중해 건너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것들이 이베리아반도로 유입되는 주요 경로였다. 그중 하나가 아시아의 벼농사와 쌀 요리 문화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쌀’이었다. 오로지 스페인의 쌀 문화를 엿보기 위해 쌀을 연구하는 학자, 유통하는 사업가 등과 발렌시아로 향했다.발렌시아 쌀로 만든 스페인 백반 "고슬고슬한 게 누룽지솥밥 같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스페인으로의 쌀 유입은 8세기경 무슬림을 통해서였다. 이후 스페인 남쪽 해안 일부와 발렌시아 인근에서 대규모 경작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발렌시아시(市)에서 차로 20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알부페라(Albufera)라는 지역이 나오고 동명의 꽤 큰 호수가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발렌시아 쌀’은 스페인 여타 지역의 쌀보다 비싸게 팔린다. 발렌시아 쌀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천 쌀인 셈이다.
스페인에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이 알부페라 호수 인근을 지나는 한국 사람들은 꽤 충격을 받는데, 그 풍경이 우리나라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땅과 하늘은 쌀을 어떤 맛으로 빚어내고 있을지 궁금해서 참기가 어려워진다. 한국에서 온 일행을 발렌시아 인근 논으로 데리고 간 산토스 루이스 씨는 발렌시아 쌀 협회의 관리자이자 여러 매체에 음식 관련 칼럼을 쓰는 음식 비평가다. 우리는 함께 쏟아져 내리는 태양의 열기에 습기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알부페라의 논 앞에 섰다. 논 중앙에 물길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논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논 중간중간에 잡초와 피가 보였다. 동행한 전남 해남의 쌀 생산자는 그 꼴을 참지 못하고 알부페라의 논으로 뛰어 들어가 피를 뽑기 시작했다. 한국 농부의 열정은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우리는 발렌시아의 대표적 쌀 요리인 파에야를 먹으러 1922년부터 영업해온 유서 깊은 식당 카사 카르멜라로 이동했다. 파에야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요리로 인식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파에야는 쌀농사 지역인 발렌시아에서만 먹던 음식이었는데 발렌시아 쌀 협회의 노력으로 스페인 전역에서 먹는 요리가 됐다. 파에야는 양념 육수에 쌀을 넣어 뚜껑이 없는 큰 팬에서 천천히 끓이면서 소스가 적절히 배어들어 가게 조리한다. 그 팬의 이름이 파에야(Paella)다. 이 지역 사람들은 쌀 요리를 할 때 쌀을 씻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쌀을 씻으면 쌀의 맛있는 성분이 씻겨 나간다고 생각한다.
두 나라의 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의 차이는 익힘 정도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에서 잘 지은 밥은 그들에겐 너무 익어 무른 밥이다. 반면에 발렌시아 전통 방식의 파에야는 우리에겐 설익은 밥이다. 심이 씹힌다. 파에야 조리법은 쌀의 겉은 부드럽게 익혀 소스가 잘 배어야 하는 반면 속은 덜 익혀 심이 씹히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파에야용 쌀은 겉면에 미세한 기공과 주름이 잡혀 소스가 잘 배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모양은 통통해서 속으로의 열 전달이 느린 것이 좋다. 그래야 심이 생긴다. 발렌시아에서는 이런 특성을 지닌 봄바(Bomba)라는 품종의 쌀 재배를 중세 이후 고집해왔다. 그러나 21세기 기준에서 봄바는 수량성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수량성이 좋은 신품종 세니아(Senia)의 재배가 늘며 봄바를 대체하고 있다. 이날 카사 카르멜라에서 나온 파에야는 봄바가 아니라 세니아 품종으로 요리한 것이었다. 세니아는 봄바에 비해 알이 좀 더 작고 찰기가 있어서 마치 한국 품종 신동진쌀로 밥을 지어 먹는 느낌이었다. 물론 심이 씹혔다.
테이블 중앙에 커다란 파에야 팬이 놓였다. 유럽에서는 먹을 만큼 음식을 앞접시에 덜어 먹는 것이 일반적인 매너지만, ‘발렌시아 방식’은 다르다. 파에야를 마치 한국의 철판 볶음밥처럼 만들어 먹는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문화다.
산토스는 내게 이 지역 바다 사람들의 쌀요리인 ‘소카라트(Socarrat)’를 꼭 경험해야 한다고 했다. 스페인어에서 ‘소카라르(socarrar)’는 ‘겉을 태워 그을리다’라는 뜻이다. 즉, 소카라트는 쌀의 겉을 태워 그을린 요리라는 건데 도대체 뭘까. 산토스는 발렌시아 남쪽의 데니아(Denia)라는 항구 마을에 미쉐린 3스타 셰프인 키케 다코스타의 식당이 있는데, 메뉴에 있는 음식은 아니지만 소카라트를 부탁해 놨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만을 위한 특별 쿠킹 클래스에 참가했다. 데니아 사람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데니아의 어부들은 배 안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조업을 나갈 때 이미 조리된 파에야를 들고 탄다. 배에서 식사 시간이 되면 식은 파에야를 팬에 올려 덥히는데, 쌀이 딱 한 층만 쌓일 정도로 아주 얇게 펴서 올린다. 아마 식은 파에야를 배 안에서 가장 빨리 덥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특별 쿠킹 클래스에서 셰프가 직접 요리해준 소카라트의 모습은 영락없는 누룽지였다. 파에야에 육수를 조금 더 부은 후 졸아들 때까지 짭조름하고 바삭하게 익힌다. 다 익은 소카라트 끝을 주걱으로 돌아가며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그리고 탁 뒤집으면 요리 끝. 소카라트는 바쁜 선상에서 손으로 먹는 음식이다. 소카라트를 적당량 손으로 뜯어내 반으로 접는데, 바닥에 눌어 바삭해진 부분이 바깥으로 가게 접어 호호 불며 입으로 가져간다. ‘겉바속촉’의 짭조름한 누룽지다.전국 명품 막걸리 선보이자 "日 사케보다 맛 풍부하네요"
석 달 뒤 12월의 서울. 스페인 발렌시아의 쌀 관련 전문가 일곱 명은 한국의 쌀산업과 문화를 보기 위해 춥디추운 12월의 한국으로 왔다. 이런 추위는 생전 처음이라고 했다. 그해 9월 방문했던 유럽 쌀의 수도 발렌시아에서 내가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제대로 된 쌀 관련 간편식이 없었고, 또 쌀을 활용한 술도 없었다. 나는 한국을 방문하는 스페인 친구들에게 한국의 다양한 쌀 간편식과 막걸리를 소개해 주고 싶어졌다.
나는 이들에게 한국의 진보한 쌀 가공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CJ의 힘을 빌렸다. CJ는 흔쾌히 승낙했다. 스페인 친구들은 경기 수원 영통에 있는 CJ중앙연구소에서 다양한 냉동 볶음밥 제품을 경험했고 한국의 쌀 가공 기술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연구원들에게 CJ가 유럽에 쌀 가공공장을 짓게 된다면 꼭 발렌시아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산토스는 파에야가 스페인에서 ‘주말 점심에 먹는 음식’으로 포지셔닝돼 있는 이유가 조리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파에야가 한국식 냉동 간편식으로 구현돼 나온다면 스페인 사람들이 파에야를 평일 저녁에도 간편하게 즐기게 될 것이라며 희망에 부풀었다. 다음날 나는 그들을 서울 이수역 인근 주점 ‘낯선한식 븟다’로 초대했는데, 이 일곱 스페인 친구들은 쌀을 활용한 한식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처음 보는 쌀 막걸리에는 그다지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내 실력을 보일 차례다. 음식의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맛과 향으로 연속적인 파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부드럽다가 거칠다가, 길다가 짧다가, 달다가 시다가, 쓰다가 짜다가를 순차적인 자극의 파도로 잘 설계해 음식의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설계에 들어간다.
스페인 친구들을 덮친 첫 파도는 막걸리계의 아메리카노 ‘송명섭 막걸리’였고, 이어서 누룩으로 빚어 자연스러운 단맛과 산미가 톡 튀는 김해평야의 쌀로 만든 ‘가야’가 밀려왔다. 그리곤 다시 산미가 낮고 부드러운 식감의 ‘나루 생막걸리 프리미엄’의 파도를 내보냈다. 많이 권하지 않는다. 딱 반 잔씩만 권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마신 막걸리는 쌀과 효모 말곤 들어간 게 없어요. 그럼에도 맛과 향이 정말 다채롭지 않나요?” 첨가물 없이 이 다채로움이 나온다고? 스페인 친구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오늘의 4번 타자는 ‘양평 C막걸리 퀴베’다. 쌀, 노간주나무 열매, 건포도, 그리고 배즙을 발효한 가향 막걸리다. 이 막걸리를 잔에 따르는데, 처음엔 무관심하던 그들의 얼굴에 이젠 흥미로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4번 타자의 거센 물결. 이를 맛본 후 놀라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조금만 더 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섯 번째 물결을 ‘펑’하고 쐈다. ‘양평 C막걸리 크리미 베이지’다. 쌀, 찐 고구마, 그리고 캐모마일이 그 원료다. 스페인 친구들은 쉴 틈 없이 다채로운 한국 생막걸리의 쓰나미에 자리에서 일어나 찬사의 박수를 보내줬다. 그다음 물결도 이미 설계돼 있다. ‘붉은 원숭이’ 출동. 시뻘건 핏빛 막걸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 맛은 크리미함 그 자체다. 결국 그날 우리는 13병의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산토스가 이야기했다. “문 교수, 나는 처음 쌀로 만든 막걸리에 대해 들었을 때 사케를 생각했어. 그런데 막걸리는 정말 다르네. 문 교수, 차별의 의도는 없다는 거 알아줘. 요즘 스페인의 파인다이닝업계에서 사케가 정말 많이 나와. 사케는 물론 훌륭한 술은 맞지만, 나는 좀 지루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막걸리의 다채로움은 정말 굉장한 경험이야!” “산토스, 사케는 대부분 살균 처리를 해. 그래서 안정적이지. 스탠더드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과 닮은 술이야. 나도 사케를 즐기긴 하지만 뭔가 역동적이진 않아. 막걸리는 한국 사람 같은 술이지. 한국에도 살균 막걸리가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생막걸리를 훨씬 더 좋아해. 살아있는 술이야. 살아있는 느낌이 나잖아. 한 모금 입에 넣어봐.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텍스처가 느껴지지 않아? 한국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좋아해. 이게 한국의 텍스처야.”
스페인 친구들은 생막걸리를 비행기에 싣고 가면 도중에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여러분이 다시 한국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막걸리가 좋았나요? 그럼 한국으로 다시 오세요. 좋은 술은 멀리 여행하지 않아요. 사람이 여행해야죠.”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산토스, 발렌시아에 막걸리 양조장을 하나 짓는 건 어떨까?” 산토스는 박수를 쳤고, 그는 또 다른 꿈 하나를 안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선심으로 도와줄 기업을 찾아 나섰고, 한 식품기업이 도와주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발렌시아 생막걸리는 정말 탄생할 것인가.
문정훈 서울대 푸드비즈랩 교수
발렌시아 쌀로 만든 스페인 백반 "고슬고슬한 게 누룽지솥밥 같네!"
쌀에 진심인 한국인의 '스페인 여행'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스페인으로의 쌀 유입은 8세기경 무슬림을 통해서였다. 이후 스페인 남쪽 해안 일부와 발렌시아 인근에서 대규모 경작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발렌시아시(市)에서 차로 20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알부페라(Albufera)라는 지역이 나오고 동명의 꽤 큰 호수가 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발렌시아 쌀’은 스페인 여타 지역의 쌀보다 비싸게 팔린다. 발렌시아 쌀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천 쌀인 셈이다.스페인에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이 알부페라 호수 인근을 지나는 한국 사람들은 꽤 충격을 받는데, 그 풍경이 우리나라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땅과 하늘은 쌀을 어떤 맛으로 빚어내고 있을지 궁금해서 참기가 어려워진다. 한국에서 온 일행을 발렌시아 인근 논으로 데리고 간 산토스 루이스 씨는 발렌시아 쌀 협회의 관리자이자 여러 매체에 음식 관련 칼럼을 쓰는 음식 비평가다. 우리는 함께 쏟아져 내리는 태양의 열기에 습기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알부페라의 논 앞에 섰다. 논 중앙에 물길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논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논 중간중간에 잡초와 피가 보였다. 동행한 전남 해남의 쌀 생산자는 그 꼴을 참지 못하고 알부페라의 논으로 뛰어 들어가 피를 뽑기 시작했다. 한국 농부의 열정은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우리는 발렌시아의 대표적 쌀 요리인 파에야를 먹으러 1922년부터 영업해온 유서 깊은 식당 카사 카르멜라로 이동했다. 파에야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요리로 인식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파에야는 쌀농사 지역인 발렌시아에서만 먹던 음식이었는데 발렌시아 쌀 협회의 노력으로 스페인 전역에서 먹는 요리가 됐다. 파에야는 양념 육수에 쌀을 넣어 뚜껑이 없는 큰 팬에서 천천히 끓이면서 소스가 적절히 배어들어 가게 조리한다. 그 팬의 이름이 파에야(Paella)다. 이 지역 사람들은 쌀 요리를 할 때 쌀을 씻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쌀을 씻으면 쌀의 맛있는 성분이 씻겨 나간다고 생각한다.
두 나라의 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의 차이는 익힘 정도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에서 잘 지은 밥은 그들에겐 너무 익어 무른 밥이다. 반면에 발렌시아 전통 방식의 파에야는 우리에겐 설익은 밥이다. 심이 씹힌다. 파에야 조리법은 쌀의 겉은 부드럽게 익혀 소스가 잘 배어야 하는 반면 속은 덜 익혀 심이 씹히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파에야용 쌀은 겉면에 미세한 기공과 주름이 잡혀 소스가 잘 배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모양은 통통해서 속으로의 열 전달이 느린 것이 좋다. 그래야 심이 생긴다. 발렌시아에서는 이런 특성을 지닌 봄바(Bomba)라는 품종의 쌀 재배를 중세 이후 고집해왔다. 그러나 21세기 기준에서 봄바는 수량성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수량성이 좋은 신품종 세니아(Senia)의 재배가 늘며 봄바를 대체하고 있다. 이날 카사 카르멜라에서 나온 파에야는 봄바가 아니라 세니아 품종으로 요리한 것이었다. 세니아는 봄바에 비해 알이 좀 더 작고 찰기가 있어서 마치 한국 품종 신동진쌀로 밥을 지어 먹는 느낌이었다. 물론 심이 씹혔다.
테이블 중앙에 커다란 파에야 팬이 놓였다. 유럽에서는 먹을 만큼 음식을 앞접시에 덜어 먹는 것이 일반적인 매너지만, ‘발렌시아 방식’은 다르다. 파에야를 마치 한국의 철판 볶음밥처럼 만들어 먹는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문화다.
산토스는 내게 이 지역 바다 사람들의 쌀요리인 ‘소카라트(Socarrat)’를 꼭 경험해야 한다고 했다. 스페인어에서 ‘소카라르(socarrar)’는 ‘겉을 태워 그을리다’라는 뜻이다. 즉, 소카라트는 쌀의 겉을 태워 그을린 요리라는 건데 도대체 뭘까. 산토스는 발렌시아 남쪽의 데니아(Denia)라는 항구 마을에 미쉐린 3스타 셰프인 키케 다코스타의 식당이 있는데, 메뉴에 있는 음식은 아니지만 소카라트를 부탁해 놨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만을 위한 특별 쿠킹 클래스에 참가했다. 데니아 사람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데니아의 어부들은 배 안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조업을 나갈 때 이미 조리된 파에야를 들고 탄다. 배에서 식사 시간이 되면 식은 파에야를 팬에 올려 덥히는데, 쌀이 딱 한 층만 쌓일 정도로 아주 얇게 펴서 올린다. 아마 식은 파에야를 배 안에서 가장 빨리 덥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특별 쿠킹 클래스에서 셰프가 직접 요리해준 소카라트의 모습은 영락없는 누룽지였다. 파에야에 육수를 조금 더 부은 후 졸아들 때까지 짭조름하고 바삭하게 익힌다. 다 익은 소카라트 끝을 주걱으로 돌아가며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그리고 탁 뒤집으면 요리 끝. 소카라트는 바쁜 선상에서 손으로 먹는 음식이다. 소카라트를 적당량 손으로 뜯어내 반으로 접는데, 바닥에 눌어 바삭해진 부분이 바깥으로 가게 접어 호호 불며 입으로 가져간다. ‘겉바속촉’의 짭조름한 누룽지다.
전국 명품 막걸리 선보이자 "日 사케보다 맛 풍부하네요"
쌀에 미친 스페인 사람들의 '한국 여행'
석 달 뒤 12월의 서울. 스페인 발렌시아의 쌀 관련 전문가 일곱 명은 한국의 쌀산업과 문화를 보기 위해 춥디추운 12월의 한국으로 왔다. 이런 추위는 생전 처음이라고 했다. 그해 9월 방문했던 유럽 쌀의 수도 발렌시아에서 내가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제대로 된 쌀 관련 간편식이 없었고, 또 쌀을 활용한 술도 없었다. 나는 한국을 방문하는 스페인 친구들에게 한국의 다양한 쌀 간편식과 막걸리를 소개해 주고 싶어졌다.나는 이들에게 한국의 진보한 쌀 가공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CJ의 힘을 빌렸다. CJ는 흔쾌히 승낙했다. 스페인 친구들은 경기 수원 영통에 있는 CJ중앙연구소에서 다양한 냉동 볶음밥 제품을 경험했고 한국의 쌀 가공 기술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연구원들에게 CJ가 유럽에 쌀 가공공장을 짓게 된다면 꼭 발렌시아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산토스는 파에야가 스페인에서 ‘주말 점심에 먹는 음식’으로 포지셔닝돼 있는 이유가 조리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파에야가 한국식 냉동 간편식으로 구현돼 나온다면 스페인 사람들이 파에야를 평일 저녁에도 간편하게 즐기게 될 것이라며 희망에 부풀었다. 다음날 나는 그들을 서울 이수역 인근 주점 ‘낯선한식 븟다’로 초대했는데, 이 일곱 스페인 친구들은 쌀을 활용한 한식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처음 보는 쌀 막걸리에는 그다지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내 실력을 보일 차례다. 음식의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맛과 향으로 연속적인 파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부드럽다가 거칠다가, 길다가 짧다가, 달다가 시다가, 쓰다가 짜다가를 순차적인 자극의 파도로 잘 설계해 음식의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다. 설계에 들어간다.
스페인 친구들을 덮친 첫 파도는 막걸리계의 아메리카노 ‘송명섭 막걸리’였고, 이어서 누룩으로 빚어 자연스러운 단맛과 산미가 톡 튀는 김해평야의 쌀로 만든 ‘가야’가 밀려왔다. 그리곤 다시 산미가 낮고 부드러운 식감의 ‘나루 생막걸리 프리미엄’의 파도를 내보냈다. 많이 권하지 않는다. 딱 반 잔씩만 권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마신 막걸리는 쌀과 효모 말곤 들어간 게 없어요. 그럼에도 맛과 향이 정말 다채롭지 않나요?” 첨가물 없이 이 다채로움이 나온다고? 스페인 친구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오늘의 4번 타자는 ‘양평 C막걸리 퀴베’다. 쌀, 노간주나무 열매, 건포도, 그리고 배즙을 발효한 가향 막걸리다. 이 막걸리를 잔에 따르는데, 처음엔 무관심하던 그들의 얼굴에 이젠 흥미로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4번 타자의 거센 물결. 이를 맛본 후 놀라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조금만 더 달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섯 번째 물결을 ‘펑’하고 쐈다. ‘양평 C막걸리 크리미 베이지’다. 쌀, 찐 고구마, 그리고 캐모마일이 그 원료다. 스페인 친구들은 쉴 틈 없이 다채로운 한국 생막걸리의 쓰나미에 자리에서 일어나 찬사의 박수를 보내줬다. 그다음 물결도 이미 설계돼 있다. ‘붉은 원숭이’ 출동. 시뻘건 핏빛 막걸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 맛은 크리미함 그 자체다. 결국 그날 우리는 13병의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산토스가 이야기했다. “문 교수, 나는 처음 쌀로 만든 막걸리에 대해 들었을 때 사케를 생각했어. 그런데 막걸리는 정말 다르네. 문 교수, 차별의 의도는 없다는 거 알아줘. 요즘 스페인의 파인다이닝업계에서 사케가 정말 많이 나와. 사케는 물론 훌륭한 술은 맞지만, 나는 좀 지루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막걸리의 다채로움은 정말 굉장한 경험이야!” “산토스, 사케는 대부분 살균 처리를 해. 그래서 안정적이지. 스탠더드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과 닮은 술이야. 나도 사케를 즐기긴 하지만 뭔가 역동적이진 않아. 막걸리는 한국 사람 같은 술이지. 한국에도 살균 막걸리가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생막걸리를 훨씬 더 좋아해. 살아있는 술이야. 살아있는 느낌이 나잖아. 한 모금 입에 넣어봐.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텍스처가 느껴지지 않아? 한국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좋아해. 이게 한국의 텍스처야.”
스페인 친구들은 생막걸리를 비행기에 싣고 가면 도중에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여러분이 다시 한국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막걸리가 좋았나요? 그럼 한국으로 다시 오세요. 좋은 술은 멀리 여행하지 않아요. 사람이 여행해야죠.”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산토스, 발렌시아에 막걸리 양조장을 하나 짓는 건 어떨까?” 산토스는 박수를 쳤고, 그는 또 다른 꿈 하나를 안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선심으로 도와줄 기업을 찾아 나섰고, 한 식품기업이 도와주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발렌시아 생막걸리는 정말 탄생할 것인가.
문정훈 서울대 푸드비즈랩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