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에바 호프의 삶으로 위로 전하는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
극작가 강남 "'사느라 수고했다'는 낯부끄러운 위로, 객석에 들려주고 싶었어요"
"긴 절망의 터널에서 마침내 나온 호프…'나라고 못할까' 싶죠"
버려지고, 외면당하고, 짓밟히고…평생 상실 속에서 살아온 한 여인이 있다.

포기할 법도 한 삶을 이어가게 한 것은 엄마가 남기고 간 한 소설가의 원고. 그러나 이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놓인다.

힘없는 78세 노인이 된 여인 에바 호프는 원고 없이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 소유권을 둘러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한 개인의 재판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세 번째 시즌으로 관객과 만났다.

2019년 초연한 '호프'는 주인공 에바 호프가 원고에 집착하게 된 배경을 파헤치며 고된 삶을 견뎌온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작품이다.

대본을 쓴 극작가 강남은 첫 상업 뮤지컬 데뷔작이었던 이 작품으로 2019년 한국뮤지컬어워즈, 예그린뮤지컬어워즈 등에서 극본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지난 14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78세의 나이에도 절망의 터널에서 나온 호프를 보고 관객이 '나라고 못 하겠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긴 절망의 터널에서 마침내 나온 호프…'나라고 못할까' 싶죠"
이야기는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싸고 실제 벌어졌던 재판에서 출발한다.

처음 기사로 재판 이야기를 접한 강남 작가는 "왜 원고를 지키려고 할까"라는 의문에서 작품이 시작됐다고 했다.

"보상을 충분히 준다고 하는데도 원고를 지키려고 긴 시간 재판까지 하는 걸 보며 '이 사람에게 원고가 어떤 의미일까'라는 상상이 시작됐죠."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간다.

흔한 법정 드라마나 추리극 대신 주인공 호프의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차 세계대전을 피해 도망치던 소설가 베르트는 자신의 연인이자 호프의 엄마인 마리아에게 친구의 미발표 원고를 맡긴다.

한순간에 따뜻한 집과 일상을 빼앗긴 마리아는 원고가 안락했던 삶에 대한 약속이라 믿으며 점점 집착하게 된다.

호프 모녀를 둘러싼 세계는 점점 더 가혹해져 가고, 유대인 수용소와 베르트의 배신, 지긋지긋한 가난이 이어진다.

"긴 절망의 터널에서 마침내 나온 호프…'나라고 못할까' 싶죠"
호프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늙은 엄마를 떠나는 등 잘못된 선택도 내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특별한 영웅이 아닌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관객에게 공감을 자아낸다.

"무너질 때 무너지고, 아파할 때 아파하는 호프는 전혀 특별하지 않고 보편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인물이 마지막엔 좀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이 많은 관객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작품은 원고를 의인화한 'K'를 통해 호프의 곁을 지키는 원고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호프에게 그녀의 삶은 원고 없이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말해주는 것도 K다.

강남 작가는 K를 통해 자신이 듣고 싶은 위로를 관객에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너 자신이 네 인생에 같이 있어 주느라 수고했다', 이런 직접적인 위로가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시대잖아요.

K는 원고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죠."
"긴 절망의 터널에서 마침내 나온 호프…'나라고 못할까' 싶죠"
강남 작가에게도 위로가 필요했던 시절은 있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극작가로 데뷔한 그는 대학에서 연극 연출을 전공하고 10년 가까이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무대 감독, 조연출 등 스태프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학교 다닐 때 재능도 없고 노력도 못 하는 학생이었다"는 그는 "그래도 공연이 좋아서 계속 관련된 일을 했다"고 털어놨다.

"아이디어도 진부하고 노력도 잘 못하고…졸업만 하면 이 분야에서 사라질 것 같은 학생이었죠. (웃음) 이것만 하고 포기하자, 하면서 계속 공연계에 남아있었어요.

"
스태프로 일을 하면서도 간절한 창작 욕구에 많은 극작가 아카데미에 지원했고, 그렇게 나오게 된 작품이 '호프'다.

"저는 강하지도 않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산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히려 호프처럼 긴 절망의 터널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호프'는 '이제는 더 못 가겠지' 싶은 사람이 멈추지 않고 더 가는 이야기입니다.

"
"긴 절망의 터널에서 마침내 나온 호프…'나라고 못할까' 싶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