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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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레드 하우스(Red House)에 갈 수 있다. 이곳은 미술공예운동(Arts & Crafts Movement)의 창시자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신혼집으로 지은 붉은 벽돌집이다.
중세를 사랑한 모리스가 기계를 싹 빼고 지은 '빨간집'
레드하우스,_벡슬리히스_사진_-_ethan_doyle_white

서양 디자인의 역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책은 모리스의 미술공예 운동을 근대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공예, 디자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레드 하우스 방문은 성지 순례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레드 하우스는 모리스의 청년기 예술적 감수성과 낭만을 집대성한 결과였다. 모리스는 1859년 친구였던 건축가 필립 웹(Philip Webb, 1831-1915)에게 이 집을 13세기 건축 양식 근거해 설계해달라고 의뢰했다.

이는 레드 하우스가 그만큼 중세적 관점에서 ‘기본에 충실한 집’이라는 의미였다. 레드 하우스는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절충주의 양식 주택과 비교해보았을 때 합리적이고 간결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었다.

건축 자재 선택에 있어서도 당시에 산업적으로 생산된 재료보다 천연 재료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적용했다.

이 집은 이름에 걸맞게 안팎으로 모두 붉은 벽돌로 마감되어 있다. 집 안에 배치된 벽난로, 고딕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뾰족한 아치형 실내 구조물에도 외벽과 동일한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레드 하우스의 창문은 원형, 직사각형, 아치형 등 다양한 형태이다. 창문을 둘러싸는 벽돌을 쌓는 방식은 창문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식은 최대한 중력의 힘을 거스르지 않도록 했다. 이는 건축 자재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달성되기 어려웠을 섬세함도 보여준다.

‘필요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집에 두지 말라'

노동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강조했던 모리스의 사상과 웹의 실리적 디자인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도 레드 하우스의 주요한 특징이다.

비대칭인 L자 평면으로 계획된 레드 하우스는 주거 공간이 정원을 감싸고 있어 정원을 생활공간의 일부로 포용할 수 있었고, 당시 다른 주택에 비해 노동 공간도 상대적으로 쾌적했다.

1층, 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넓은 공간을 부엌 및 노동 공간에 할애했는데, 부엌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어 집안일을 수월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산업 현장에서 노동 착취가 만연했던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의 효율성을 주택 공간에 반영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의적이다.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화병에 꽂힌 화려한 꽃 부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인가 의심할 만큼 화병에 꽂힌 꽃은 화려하고 풍성하다.

모리스는 토지 매입 단계에서부터 이미 신혼집 정원 디자인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장미, 라벤더, 허니 서클 등 고전적 수목을 심어야 했으며, 집은 사과나무로 둘려 쌓여 있어야 했다. 이 이미지를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모리스는 근처의 사과나무 과수원도 매입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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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가 추구했던 정원 양식은 풍경과 같이 보이는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영국식 정원에 중세적 아름다움을 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움을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강박적이고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모리스는 산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물건에 진실한 노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물건은 아름답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제품을 레드 하우스에서 사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모리스는 '필요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집에 두지 말라'고 설파하며 예술가 동료들과 함께 식탁, 책상, 의자, 찬장, 촛대, 유리잔까지 레드 하우스에서 사용하기 위한 물건을 약 2년에 걸쳐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레드하우스는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려…

모리스의 친구들, 그 중에서도 에드워드 번 존스(Sir Edward Burne-Jones, 1833~1898)의 경우 가족이 레드 하우스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레드 하우스를 완벽한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건축가 필립 웹은 집에서 사용할 그릇과 같은 집기를 디자인했고, 번 존스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PRB) 화가였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으며, 모리스 부인 제인(Jane Morris, 1839-1914)은 수를 놓았다.

또한 복원 사업을 하던 중 모리스 부부 침실의 벽면에서 창세기를 묘사한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은 로세티의 연인이자 라파엘 전파의 모델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이 로제티의 도움을 받아 그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레드 하우스의 천장에 뚫린 수백 개의 바늘구멍도 템페라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을 전사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협업을 통해 모리스는 가정을 이루는 동시에 동지애도 일구었다.

이러한 모리스의 노력은 전통적인 수공예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미술공예운동이 그것인데, 모리스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체제를 반대하고, 중세시대 전통적인 수공예품의 희귀를 선언했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 전역의 생활 미술, 장식 미술, 즉, 아르누보(Art Nouveau), 유겐트스틸(Jugend Stil),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등의 성립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리스는 장식 예술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사업가이기도 했다. 모리스는 ‘모리스 상회(Morris & Co)’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벽지와 가구를 생산했고, 사우스켄싱턴뮤지엄(South Kensington Museum)의 실내장식과 버밍엄 대성당(Birmingham Cathedral)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과 같은 중요한 의뢰도 수행했다.

이에 더해 모리스 상회의 벽지, 텍스타일 등은 식물모티프로 유명했다. 모리스가 자연에 주목했던 이유는 19세기 중반, 산업화의 폐해가 직접적으로 드러났던 당시 사회상과도 관련이 있다.

템즈강은 죽음의 강으로 변했고, 영유아 사망률은 치솟았으며,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도 창궐했다. 이 시기 식물모티프는 자연을 관찰하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동시에 생명력을 재현하는, 회귀하고 싶은 근원적 유토피아의 상징과도 같았다.

모리스가 레드 하우스로 이사한 직후인 1862년에 디자인한 <트렐리스 Trellis>는 모리스의 전형적인 초기 디자인 패턴을 보여준다.

이 디자인은 가시가 있는 장미 덤불, 격자무늬 목재 구조물에서 자라는 붉은 꽃, 그리고 그곳에 날아든 네 마리 새와 곤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디자인은 격자 나무 구조물 위로 장미를 자라게 했던 중세 정원 스타일을 모방했던 레드 하우스의 정원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결과였다.
중세를 사랑한 모리스가 기계를 싹 빼고 지은 '빨간집'
윌리엄_모리스와_필립_웹

모리스는 이러한 초기 식물모티프 패턴을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켰고, 빅토리아기 부유한 중산층을 중심으로 실내 장식 분야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다만 대량생산 시스템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던 제작 과정의 비효율성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점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한계였다.

수공으로 정성들여 제작한 사물들은 공산품과 비교해 가격이 높았고, 구매 능력이 있는 중산층만이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생산된 아름다운 사물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레드 하우스의 안주인은 누구였을까?"

1859년 4월, 옥스퍼드 생미셀 교회(St Michael at the North Gate)에서 모리스가 제인과 결혼했을 때 제인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마부의 딸이었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제인은 모리스와 어울리는 결혼 상대는 아니었지만 제인은 세기말적 ‘우울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고, 모리스는 그런 제인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이상화된 중세적 낭만을 제인에게 투사했고, 그 이미지를 숭배했다. 모리스는 제인을 모델로 유화 작품 <아름다운 이졸데 La Belle Iseult>(1858)를 그렸다.
중세를 사랑한 모리스가 기계를 싹 빼고 지은 '빨간집'
윌리엄_모리스_아름다운_이졸데

갓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벨트를 착용하는 그림 속의 그녀는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돋보이는 것은 오히려 물건들이다.

페르시안 산 카펫, 가구, 집기 등은 그 그림의 소유자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며, 그림 속의 여인도 예외가 아니다.

모리스는 중세를 사랑했다. 중세는 그에게 자본주의로 황폐해진 현실의 반대편에 위치한 성소와 같았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건축, 미술, 문학 속의 낭만적 사랑과 기사 이야기는 레드하우스의 장식 모티프인 동시에 모리스를 유토피아로 이끄는 인도자와 같았다.

모리스는 중세 영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c. 1343-1400)의 소설 『켄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모리스가 레드 하우스를 짓기 위한 장소로 벡슬리히스(Bexleyheath)를 선택했던 이유도 이곳이 켄터베리 성당으로의 성지 순례길에 인접했기 때문이었다. 모리스는 제인 버든과의 결혼이 축복받은 결말로 이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남편의 동료였던 로제티와 불륜 관계를 이어가며 빅토리아 시대 최대의 스캔들이 되었다. 모리스와 제인은 레드하우스에서 두 딸을 낳았고, 친구들과 공동체적 결성도 실험했지만, 부부로서 그들의 관계는 비참했고, 신혼의 단꿈은 악몽이 되어버렸다.

1865년 모리스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레드 하우스를 매각해야 했다. 2003년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레드 하우스를 매입할 때까지 이 집은 개인 주택이었으며, 사유 재산이었던 레드 하우스를 공공재로 전환하기 위해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다.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21세기에 환생하여 그가 디자인했던 벽지는 지금도 모리스 상회를 통해 생산, 판매되고 있으며, 그가 썼던 시, 소설은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에서도 백 년이 넘는 시간차를 극복하고 번역, 출판되고 있다.

모리스의 이 모든 성취의 씨앗이 레드 하우스에서 뿌려졌을까. 젊은 모리스가 구현했던 중세의 유토피아 레드 하우스. 그 실질적 실험 공간이 없었다면 모리스의 낭만이 21세기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은 『뮤지엄게이트』의 8장 ‘신혼집과 유토피아 사이에서’를 각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