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는 레고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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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문보영의 낯선 세계
25년 전 내 글이, 파도에 밀려
오늘 나에게 실려온다면
25년 전 내 글이, 파도에 밀려
오늘 나에게 실려온다면
필리핀 전화영어 선생님 앤은 주식시장을 분석하는 증권 애널리스트였다. 두 달 정도 훈련을 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써야 할 것이 정해져 있거든. 삶은 불확실한데 해야 할 게 정해져 있다는 게 좋았어. 그런데 몇 년간 이 일을 반복하니 삶은 확실해졌지만, 난 오히려 불확실한 것을 원하게 되었어. 그래서 나에 관해 쓰기 시작했지. 나에겐 나만큼 불확실한 게 없었거든.”그녀는 자기 전에 끄적이던 글을 한 연재 플랫폼에 업로드했는데,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본명 대신 팬네임을 고수한 그녀에게 이유를 묻자 “내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라고 답했다. 하지만 앤은 1년도 되지 않아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신상이 털리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고 스토킹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계정과 내가 쓴 글을 전부 지워버렸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다들 만류했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럼 이제 글 안 써?”
“그곳을 떠나고 나서 글을 더 잘 쓰게 되었어. 전화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시간 날 때 끄적이고 있어. drafts가 아주 많거든.”
난 draft가 뭐냐고 물었다. 앤은 drafts는 ‘끝내지 않은 작업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더 묻고 싶었지만 앤은 더 이상 자신이 떠나온 과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늘의 데일리 뉴스 '
바다에서 떠다니는(drift) 레고 조각에 관한 이야기였다. 컨테이너를 싣고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항해하던 화물선이 폭풍을 만나 컨테이너를 바다에 떨어뜨렸는데 그 안에 수만 개의 레고 조각과 장난감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25년이나 지난 사건인데, 레고 조각들은 여전히 인근 해변에 떠밀려오고 있다. 레고 조각들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도 가 닿았으며 프랑스, 영국까지 헤엄쳐가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표류(drift)라는 단어와 끝나지 않은 작업(draft)이라는 단어가 겹쳐 떠올랐다. 앤이 놔두고 온 방대한 글이, 폭풍을 만난 화물선에 물속에 빠트린 수많은 레고 조각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글로 써도 재밌겠어."
"어떤?"
"자신의 글을 바다 한가운데서 잃어버렸으나 25년 뒤, 글의 조각들이 해변에 나타나다."
"내 얘기야?"
"응."
나는 답했다.
"draft와 drift를 사용해 운율을 만들 거야. 끝내지 않은 것이 표류하여 돌아온다. draft drifts. 라임 어때?"
"내 글이 장난감이 되어서 해변에 나타나면 땡큐지. 근데 이 기사에 보면, 25년 전에 사라졌던 작은 용 모양의 레고가 새것보다 더 새것처럼 반짝였다고 적혀 있네."
"어떻게 더 새로워질 수 있냐. 너무 오래 방황하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냐……."
방황은 일종의 긴 목욕인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트레이시 윌리엄스라는 여성은 매일 아침 개와 함께 영국 남서부 콘월 해변을 산책하며 레고 조각을 줍는다고 한다. 그녀는 스카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린 시절의 장난감들이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도 이것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 멋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