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5월 리벨리온의 칩을 탑재하겠습니다.”윤동식 KT클라우드 대표가 지난 18일 ‘KT클라우드 서밋 2023’에서 엔비디아 등 외산 반도체 의존을 줄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리벨리온은 2020년 만들어진 AI 반도체 스타트업이다. 이 업체는 최근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엠엘퍼프(MLPerf) 대회에서 미국 엔비디아와 퀄컴을 앞섰다. 리벨리온의 AI 반도체 ’아톰‘은 언어처리, 이미지 분석 영역에서 1.4~3배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리벨리온을 창업한 박성현 대표는 KAIST 전자과를 수석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컴퓨터공학 인공지능랩(CSAIL)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인물이다. 첫 직장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를 설계하는 인텔을 택했다. 이후 스페이스X에서 인공위성 칩을 만들었고, 모건스탠리 퀀트 트레이더로 일하며 금융 지식을 쌓았다. 한국의 반도체산업 생태계를 기반으로, AI 반도체의 ’전세 역전‘이 시작될 것이란 믿음에서 1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대, KAIST를 거쳐 IBM 왓슨연구소에서 AI 반도체 수석 설계자로 재직한 오진욱 최고기술책임자(CTO)가 함께했다.
포스코·현대차·삼성…‘큰 손’ 잡는 AI 반도체
AI 반도체 스타트업 딥엑스는 최근 포스코DX, 현대자동차그룹과 연이어 협력 구도를 형성했다. 포스코DX와는 공장과 물류 설비 제어시스템에 AI 반도체를 탑재해 대단위 자동화 솔루션을 구현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로봇 플랫폼 연구조직인 로보틱스랩과도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AI 모델 추론에 쓰이는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제공하기로 했다. 딥엑스는 김녹원 경희대 컴퓨터공학부 교수가 2018년 창업했다. 그는 애플에서 ‘아이폰X’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만든 시스템 반도체 전문가로 꼽힌다. 딥엑스는 지난 14일엔 대만 반도체 유통사 코아시아그룹과 MOU를 맺기도 했다. 코아시아그룹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전속 협력 기업인 코아시아일렉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사피온은 지난해 4월 SK텔레콤의 사내 AI 반도체 사업 부문이 독립한 업체다. SK스퀘어·SK하이닉스가 투자에 참여해 설립을 도왔다. 사피온은 국내 최초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인 ‘X220’을 개발하며 주목받았다. 미국 조지아 공대 박사 출신인 류수정 대표가 업체를 이끈다. 퓨리오사AI는 류 대표 동문인 백준호 대표가 2017년 창업했다. 백 대표는 미국 반도체 기업 AMD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팀 출신이다. 퓨리오사AI의 AI 반도체 ‘워보이’는 지난 5일 삼성전자에서 양산에 돌입했다.
AI 반도체는 GPU를 이길 수 없다?
산업계에서 AI 반도체가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56년 신경학과 정보이론의 발달로 AI 이론이 정립된 이래, AI는 혹한기를 반복해왔다. 다량의 논문이 이어져 왔으나, 빛을 보지 못한 주요 이유는 하드웨어 발달 속도가 AI 이론을 구현해내기에 너무 늦다는 점이었다. 2010년대 딥러닝 기법이 등장하며 AI 서비스가 쏟아져나온 배경엔 정보처리장치의 발달이 있었다. 하드웨어 내부에 별도 명령어 저장공간(컨트롤 메모리)을 놓는 프로그래머블 반도체(FPGA), NPU셀을 놓는 머신러닝하드웨어(ASIC)가 모두 AI 반도체로 분류된다. 쓰임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대량 연산에 최적화된 에너지 효율과 속도를 자랑한다.
업계 한 연구원은 “CNN은 데이터 재사용이 굉장히 많은데, ViT와 같은 트랜스포머 계열 기법은 데이터 재사용이 별로 없어 AI 반도체를 쓸 이유가 없다”며 “결국 연구자들은 곱셈, 덧셈을 제일 잘하는 GPU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투자금 소진 전 구매처 찾기 ‘사활’
추가적으로 넘어야 할 산은 ‘구매처 찾기’다. AI 반도체 스타트업들이 대기업과의 협력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AI 반도체는 시제품을 만드는 데만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이 드는 고가의 비즈니스다. 매출액을 낼 대상 회사도 흔치 않을뿐더러, 투자금이 소진되기 전에 기술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시제품을 만들 때도, 효용성을 증명할 때도 가장 빠른 수단은 대기업과의 협력이다. 업계가 리벨리온과 KT클라우드의 상용화 실적을 주목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2020년 출시된 사피온의 AI 반도체 ‘X220’와 NHN 데이터센터의 협력 이래 국내에선 굵직한 AI 반도체 상용화 소식이 없었다.
업체들이 한 가지 더 기대를 걸고 있는 점은 정부 지원이다. 초기 단계이지만, 기술력으로 무장한 업체들이 다수 나타나며 지원 정책도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는 2030년까지 AI 반도체 분야에 약 83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상용화 초기 단계인 국산 NPU 고도화 사업을 추진하고, 메모리와 연산 프로세서 기능을 한 칩에 합친 저전력 AI 반도체 ‘PIM’의 개발도 지원한다.
생태계를 함께 구축해갈 대기업에서도 호응하고 있다. AI 반도체로 클라우드 인프라를 만들게 하는 ‘AI 반도체 팜 구축 및 실증 사업’에선 국내 토종 클라우드 3사인 NHN클라우드·KT클라우드·네이버클라우드가 사피온·리벨리온·퓨리오사AI와 팀을 꾸렸다. 정부의 목표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기술 수준 구현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글로벌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은 2020년 230억달러(30조3000억원)에서 2025년에는 700억달러(92조3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