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봄철 천연가스 비축량이 12년만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등으로 인해 에너지 대란을 겪었던 유럽이 '에너지 자립'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18일(현지시간) 가스 인프라스트럭처 유럽 자료에 따르면 4월초 기준 유럽의 천연가스 비축량이 전체 저장 용량의 55.7%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겨울철 난방 시즌을 지난 뒤에도 가스 저장고의 절반 이상을 채워둔 것이다. 이는 4월초 기준 2011년 이후 최고치인 데다, 지난 5년 평균치보다 약 20% 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유럽의 가스 비축량은 2주 사이에 더 상승해 4월 중순 기준으로는 56.5%를 찍었다.

카드리 심슨 유럽연합(EU)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EU의 가스 저장고가 절반 이상 가득 차 있다는 점은 이번 겨울철 난방 시즌을 편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의미"라며 "러시아산 천연가스, 액화천연가스(LNG) 등의 수입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리고 발전원을 더욱 다양화하면 일부 회원국에서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늘린 게 역설적으로 EU의 가스 비축량을 확보하는 데 일부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레피니티브 자료에 의하면 EU의 러시아산 LNG 수입량은 지난해 22.1bcm(1bcm=10억㎡)로 2021년보다 39% 증가했다. 이는 작년 전체 수입량의 16%에 달하는 규모다. EU는 러시아산 원유 및 석유제품 등은 수입을 금지하는 제재를 가했지만 가스에 대해서는 제재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러시아산 가스가 EU의 전체 수입량의 40%에 달했던 만큼, 함부로 금수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탓으로 풀이된다.


에너지업계 데이터 업체 아르거스 미디어의 유럽 책임자인 나타샤 필딩은 "올 여름 유럽은 오히려 가스가 너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오는 11월 초까지 가스 저장 수준을 전체 용량의 9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필딩은 "7~8월이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EU가 러시아산 LNG 등을 더 이상 구매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을 늘리는 데 기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EU 에너지 장관들은 정례회의에서 "회원국들이 러시아와 러시아의 최우방국 벨라루스로부터 가스 수입을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의결하기도 했다. 당시 조치는 EU 의회 문턱을 통과하면 효력을 갖게 된다.

다만 EU가 에너지 자립을 너무 과신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LNG 등의 수입을 갑자기 억제하면 또 다시 에너지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다. 전 세계적으로 신규 대형 LNG 프로젝트들이 가동되고 있지만, 실제 공급까지 10년 이상 소요되는 장기 과제라는 점에서다. 올해 있을 중국의 경제 회복세가 글로벌 LNG 수요에 미치는 영향도 살펴야 한다. 전통적으로 최대 LNG 수입국이었던 중국이 경제 재개 이후 글로벌 시장의 LNG를 흡수하면 가스 가격이 급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