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금융 수도로 불리던 영국 런던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로 쇠락한 뒤 프랑스 파리가 새로운 금융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앞다퉈 런던에 있던 유럽 본부를 파리로 이전하고 있다. 프랑스 금융권에선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가 다시 찾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런던 떠나 파리로 몰려든 글로벌 IB

유럽 금융허브 된 파리…런던서 '자금 대이동'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글로벌 IB들은 최근 런던에서 파리로 본거지를 옮기고 있다. 세계 최대 IB인 JP모간은 2020년 런던에 있던 유럽 본부를 파리로 옮긴 뒤 직원 수를 550여 명까지 늘렸다. 파리로 이전하기 직전인 2019년에 비해 22배 증가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18년 런던에 있던 유럽본부를 파리로 이전한 뒤 규모를 2016년 대비 6배 확장했다. 파리의 경쟁상대인 프랑크푸르트에 본사를 둔 도이체방크도 지난해 신용 사업부를 파리에 신설했다.

글로벌 IB들이 파리로 이전하고 있는 건 영국이 2016년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서 더 이상 ‘패스포팅’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패스포팅이란 EU 권역에 있는 한 국가에서 설립 인가를 받으면 다른 국가에 지점 개설 시 별도 인가받을 필요가 없는 제도다.

영국에 머물 요인이 사라지자 인재와 자산이 유럽 대륙으로 이동했다. 컨설팅업체 EY에 따르면 2016~2021년 런던에서 7600여 개의 전문직 일자리와 1조3000억유로(약 1880조원) 규모의 자산이 유럽으로 넘어왔다. 7600여 개 일자리 중 3000여 개가 파리로 옮겨갔다. 런던이 가난해질수록 파리가 부유해졌다는 의미다.

프랑스는 브렉시트를 계기로 2019년 런던에 있던 EU 은행위원회를 파리에 유치했다. 유럽증권시장국(ESMA), 유럽은행감독청(EBA) 등에 이어 유럽 주요 금융 당국이 모두 파리에 본사를 둔 것이다. 프랑스는 금융기관 주재원들을 위해 지난 2년간 파리에 국제학교 3개를 신설했다.

지난해 11월엔 프랑스 증시의 시가총액(2조8230억달러)이 19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증시(2조8210억달러)를 앞섰다. 작년 9월 리즈 트러스 내각이 발표한 감세안의 여파로 영국 증시가 급락하고 파운드화 가치가 37년 만에 최저치를 찍은 여파다. 트러스의 사임으로 일단락됐지만 영국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반면 프랑스는 올해 중국 리오프닝 효과로 명품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되면서 영국과의 격차를 4000억달러가량 더 벌렸다.

○파리로 인재·돈 몰린다

파리가 유럽의 금융 허브로 떠오르자 프랑스 금융권에선 벨 에포크가 다시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벨 에포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의 문화예술 전성기를 뜻한다.

우선 프랑스 내에 고소득층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IB 트레이더와 펀드매니저가 파리로 이주해서다. 지난 1월 EBA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고소득(연봉 100만유로 이상) 금융업 종사자 수는 2017년 이후 80% 증가한 255명을 기록했다.

고소득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파리의 고급주택 가격도 상승했다. 사회주택 공급량이 많고 자가 거주율(33%)이 낮은 파리 특성을 감안하면 집값이 오른 건 이례적이다. 주로 파리 7구, 8구, 16구 등 IB 유럽 본사가 몰려 있는 개선문 인근 지역이 급등했다. 세 지역에서 면적 200㎡(약 60평) 이상 고급 아파트 가격은 지난 5년간 33% 상승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