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가 미국 기업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강등했다. 지난해 미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급격히 인상하자 자본조달 비용이 치솟아서다. 경제 둔화로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하면 평가 기준이 더 엄격해져 우량기업도 위험하다는 관측이다.

2020년 이후 최다 강등

19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올해 1분기 114억달러(약 15조 1403억원) 규모의 미국 회사채를 투자 등급에서 정크본드(투기등급 회사채)로 강등했다. 지난해 발행된 회사채의 60%에 달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영국 은행 바클레이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 중앙은행(Fed)이 급격히 금리를 인상한 데 따른 여파다. 신용평가사들은 이자 비용이 치솟으며 기업의 자본조달 환경이 악화한 것을 신용등급에 반영했다. 유동성이 줄어들자 투자자들의 채권 매수 심리도 위축돼 강등 규모를 키웠다.

올해 2분기에 경기가 둔화하면 우량기업도 강등 위기에 처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바클레이스는 투자적격 등급에서 투기 등급으로 강등된 '추락한 천사(Fallen Angel)'가 올해 600억~8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530억달러 수준이었다.

신용 경색에 대한 우려가 강등 기업 수를 늘렸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인한 은행 위기 여파로 인해 미국 은행이 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14일부터 이날까지 대출 총액은 950억달러 감소했다. 신용이 경색되면 신용평가 심사기준도 강화해 강등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존 윌리엄스 뉴욕연방은행 총재도 신용 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19일 뉴욕대학교 컨퍼런스에서 윌리엄스 총재는 "은행 시스템은 견고하고 탄력적이지만, 현재 은행권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기업 회사채 차입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며 "이에 따라 신용 경색이 나타나면 다시 지출이 늘어나게 된다"고 강조했다.

경제 둔화도 회사채 시장을 악화하는 요인 중 하나다. 신용평가사 피치 레이팅스는 지난 17일 올해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1%에서 1%로 낮췄다. 미국 고용지표와 소비 지표가 둔화한 것을 반영했다. 이에 따라 회사채 수요가 축소해 채권 발행을 희망하는 기업의 자본조달 비용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피치 레이팅 스는 보고서를 통해 "통화 긴축과 경기 둔화가 회사채 수요에 타격을 입혔다"며 "인플레이션이 완화하면서 제조기업의 가격 결정력이 약화하면 마진율이 떨어져 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회사채 투자 요인도 사라져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전문가들은 Fed가 금리를 계속 인상하면 10조달러 규모의 미국 회사채 시장이 붕괴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투자 등급 회사채 금리와 연방기금 실효금리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어서다.

이날 블룸버그에 따르면 은행이 Fed로부터 자본을 조달해 회사채에 투자해서 얻는 금리차인 '캐리 스프레드'가 23bp(1bp=0.01%포인트)로 떨어졌다. 2007년 이후 27년 만에 최소치를 기록했다. AA 등급인 우량기업 회사채에 투자해도 연 0.23%의 차익을 얻는 셈이다.

캐리 스프레드는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자본을 조달해 고금리 상품을 매입하는 투자 전략을 뜻한다. 2001년 일본 가정주부들 금리가 0%대였던 자국에서 돈을 빌려 미국 기업 회사채에 투자하던 현상인 '와타나베 부인'도 캐리 스프레드의 일종이다.

지난해 Fed가 급격히 금리를 인상하면서 캐리 스프레드가 축소됐다는 분석이다. 금리 인상에 따라 회사채 금리도 오르지만, 연방기금 실효금리에 비해 반영되는 속도가 느리다. AA 등급의 우량기업의 경우 회사채 만기 평균값은 5~7년에 이른다. 반면 이른바 '콜 금리'로 여겨지는 연방기금 실효금리는 1일짜리 초단기 금리다.

캐나다 TD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 위기 때문에 회사채 수요가 급격히 축소됐다. 예금 인출이 이어지자 은행이 차입금을 활용한 회사채 투자에 대한 리스크가 커졌다. 미 금융 당국의 감독도 한층 강화된 상황이다. 리스크가 큰 상황에선 은행이 '빚투'를 하지 않을 거라는 주장이다.

은행이 회사채 투자 비중을 줄이게 되면 시장 전체가 흔들릴 거란 우려가 나온다. 은행이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는 규모는 헤지펀드 및 자산운용사에 비해 적지만,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아서다. TD증권은 은행이 보유한 미결제 회사채는 7%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장 전체에 강등 위험이 늘고 있다고 관측했다.

크리스티안 마지오 TD증권 포트폴리오 부문장은 "금리에 대한 민감도가 큰 은행이 대출 조건을 지금보다 더 강화하면 시장 전반에서 신용등급 조정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