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귀사의 기대수명은 얼마입니까
“미래가 사라졌다.” 최근 만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토로하는 공통된 고민이다. 최근 한 행사장에서 만난 유영상 SK텔레콤 대표는 “과거처럼 10년 후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다.

올 1분기에만 4조원대 적자를 예고한 SK하이닉스가 단적인 예다. 내부에선 누구도 반도체 사이클이 이렇게 급변할지 예측하지 못했다. “올해 이익이 어느 정도 줄 것으로 봤지만 적자를, 그것도 조(兆) 단위 손실을 볼 것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시장점유율 40%가 넘는 부동의 메모리 반도체 1위라는 시장 지위를 앞세워 감산 없는 ‘강공 드라이브’를 전개했지만, 예측치를 뛰어넘는 급격한 시장 악화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분기 어닝 쇼크는 둘째치고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시장 예측력이다.

글로벌 기업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불확실성은 상수(常數)가 됐다. 그만큼 기업의 사망률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맥킨지 컨설팅 연구 결과를 보면 1958년 당시 미국 S&P500 기업의 평균수명은 61년이었다. 현재는 20년 미만이다. 인간이 ‘슈퍼 센테니얼’(100세 이상 생존) 시대를 앞둔 것과는 딴판이다. 2027년까지 S&P500 기업의 4분의 3이 소멸할 것이라는 게 맥킨지 예측이다.

한국은 어떨까. 2000년과 2020년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순위 자료를 비교하면 이 기간에 30대 그룹 중 12곳(40%)이 사라졌다. 이들을 대신해 카카오 네이버 미래에셋 셀트리온 등 9곳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순위가 급등락한 곳도 있다. 한화는 2000년 8위에서 2010년 16위까지 내려앉았다가 다시 2020년 7위로 복귀했다. 한진은 같은 기간 4위에서 14위로 밀려났다.

2000년대 초반 10위 안팎을 유지하다 30위, 40위권으로 밀려난 곳도 적지 않다.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인수, 합병 또는 소규모 회사로 분할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그룹도 상당하다.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만 대여섯 곳이다.

한국의 많은 대기업은 이미 중년과 노년을 지나 소멸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 기업은 앞으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CEO에게 힌트가 될 만한 내용이 있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글로벌 회계 컨설팅회사인 PwC가 전 세계 CEO 441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변화(transformation)하지 않으면 향후 10년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답한 CEO가 40%에 달했다. 바꿔 말하면 “지금 상태로 머문다면 1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과장일까. “소멸하는 기업의 공통점은 경영진이 필사적으로 현상 유지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WEF의 또 다른 연구 결과다. 지난해 11월 경영난에 처한 월트디즈니를 되살리기 위해 다시 수장으로 복귀한 밥 아이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은 현상 유지”라는 말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대마불사의 시대는 끝났다. 경제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과거에나 통하던 논리였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이 여전히 굳건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데 따른 착시현상이다. 지금은 그 어떤 기업도 한 세대를 넘겨 지금의 영광을 지속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