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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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바이오산업은 규제가 엄격할 수밖에 없는 산업입니다. 사람 생명과 직결되는 의약품을 아무 장비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업계에서는 K-바이오 제품을 자동차에, 규제는 도로에 비유하곤 합니다. 자동차는 기본적으로 도로 위에서 달려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도로’를 만들지입니다. 시원한 고속도로를 뚫어 목적지까지 1시간만에 도착할 수도 있는 반면, 비포장도로로 꼬불꼬불 달려 하루 온종일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로를 만드는 것은 정부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제약·바이오기업들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도로를 없애달라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규제를 선진화·합리화해 글로벌 경쟁에서 뛰게 해달라는 것이 산업계 주장의 핵심입니다.

FDA "새로운 평가법으로 길 안내하겠다"

어떻게 하면 도로를 잘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학이 ‘규제과학’입니다. 단순히 개별 제품 하나하나에 대한 측면이 아니라 전체적인 규제시스템을 효율화해야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전통적 관점의 규제평가로는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신약들, 약처럼 처방하는 소프트웨어 앱(디지털 치료기기)과 같은 새로운 의료기기를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일찌감치 이를 인정했습니다.
FDA가 보유하고 있는 과학적 기반으로는 이미 신약들을 평가하기 턱 없이 부족한 상태이며, 이것이 근본적인 바이오산업의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제품을 평가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 기준, 평가법을 개발함으로써 ‘길을 막는 규제과학’이 아니고 ‘길을 안내하는 규제과학’을 정립하겠다.

-2012년 FDA 공식입장
출처 :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보고서 KPBMA
FDA는 새로 개발되고 있는 제품 후보군이 생기면 허가 심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선제적으로 평가도구를 개발합니다. 이후 허가신청이 들어오는 시기에 맞춰 즉시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놨습니다.

우리나라도 각 의약품들에 최적화된 맞춤형 규제과학 체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물론 속도가 느릴 순 있지만 FDA의 올 한해 예산이 10조원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1대1 비교는 어렵습니다. 참고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올해 예산은 6700억원입니다.)

민(民)-관(官) 톱니바퀴 맞물려야

지난 2월엔 국내 ‘1호’ 디지털 치료기기(DTx) 솜즈가 탄생했습니다. 연구개발에 들어간 지 3년만에 식약처 허가까지 받아냈습니다. 이후 시장진입 절차를 거치고 있는데 이르면 7월 정식 건강보험 진료비(수가)를 정하기 앞서 진행하는 혁신의료기술사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허가 이후 보험절차는 또 다른 도로입니다. 허가도 허가지만 시장에 어떻게 진입할지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솜즈와 같은 새로운 의료기기의 시장진출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존기술인지 아닌지, 요양급여 대상인지 비급여 대상인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확인하고 나면 정식 수가책정 전에 시장에 선 진입할 사업이 진행되며(최대 5년) 그이후에 한국보건산업의료연구원이 다시 신의료기술평가를 진행합니다. 남정민 기자
기존기술인지 아닌지, 요양급여 대상인지 비급여 대상인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확인하고 나면 정식 수가책정 전에 시장에 선 진입할 사업이 진행되며(최대 5년) 그이후에 한국보건산업의료연구원이 다시 신의료기술평가를 진행합니다. 남정민 기자
1. 식약처 허가를 받는다
2. 복지부 산하 심평원으로부터 기존 기술인지 아닌지 여부를 확인받는다.
3. 기존 기술이 아닐 경우 신의료기술평가(말 그대로 새로운 기술이므로 거치는 평가) 대상이 된다.
4. 본격적인 신의료기술평가에 앞서 시장에 선(先)진입한다. 기본적으로 평가를 2년간 유예해주는 ‘평가유예’ 트랙이 있는데, 디지털 치료기기나 인공지능(AI) 기반 등의 혁신의료기술은 이와는 별도의 5년간 사업을 거쳐 데이터를 쌓는다.
5. 해당 데이터를 바탕으로 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의료연구원(보의연)으로부터 신의료기술평가를 받는다.
6. 의료행위 유효성을 평가한 뒤 급여여부평가를 거쳐 정식 수가를 받고 시장에 진입한다.

적지 않은 바이오 기업들은 식약처에서 유효성, 안전성을 입증했는데 신의료기술평가를 또 거쳐야하는 점에 대해 뿔이 나있습니다.

물론 허가 단계를 위해서 필요한 임상 데이터와 시장 진입 및 보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그것이 신의료기술평가 존재의 이유겠죠.

문제는 해당 절차가 삐걱삐걱 굴러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식약처 허가를 받고 정부 고시가 나면 신의료기술평가 유예든, 3~5년간 혁신의료기술사업이든 진행할 수 있습니다. 허가와 고시 사이 2~3개월 정도 텀이 있는데 그때 비급여 코드 등록작업이 진행됩니다.

근데 그 코드 등록이 1분기에 다 마무리돼버려 하반기에 허가를 받은 기업은 그 다음해까지 기다려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2023년 6월에 식약처 허가를 받으면 원래는 8~9월쯤 비급여로 병원에 공급돼야 하는데 비급여 코드 등록작업이 이미 2023년 1분기에 끝났으니 2024년부터 병원에 공급하라는 겁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반년을 그냥 보내야하는거죠.

-바이오 A기업 대표
일단 식약처 허가를 받고, 그다음 신의료기술평가(복지부)를 2년 유예해주는 동안 데이터를 쌓은 뒤 그걸 토대로 평가받으라는 건데,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절차입니다. 물론 보험체계가 다른면도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식약처 한번, 복지부 한번 시험을 두번 쳐야 하는 입장입니다.

게다가 2년이라는 시험 준비기간도 매우 짧습니다. 규모가 작은 바이오기업들은 별도의 영업조직이 없는 경우도 많은데, 일일이 병원과 접촉해 마케팅만 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바이오 B기업 대표
신의료기술평가 유예대상을 신청했는데, 보의연이 접수번호를 안 줘요. 식약처 같은 경우는 바로 접수코드를 줘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고 추가자료를 요청하는 식인데 보의연은 아예 접수번호조차 안 줍니다.

내부에서 검토해보고 유예대상이 될 것 같으면 그때 접수번호를 준다는데, 외부에서 보기엔 진행되는 것도 없고 하염없이 또 기다리는거죠.

-바이오 C기업 CFO
앞에서도 말했지만 도로를 없애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 도로 위에서 달리긴 할텐데 적어도 도로에 패인 구멍 때문에 타이어가 고장나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바이오 기업들은 정부 기조가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씩 나아지는 편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우수한 인력들로 일궈낸 제약·바이오산업의 성장세가 국가적 경쟁력으로 연결되게끔 민-관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길 희망합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