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굴절, 이승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굴절
이승은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태헌의 한역]
屈折(굴절)
入水瞬間(입수순간)
脚腕折彎(각완절만)
外見如彼(외견여피)
傷處全無(상처전무)
近況如何(근황여하)
猶水中乎(유수중호)
[주석]
* 屈折(굴절) : 굴절, 휘어서 꺾임.
* 入水(입수) : 물에 들어가다. / 瞬間(순간) : 어떤 일이 일어난 바로 그때, ~하는 순간.
* 脚腕(각완) : 발목. / 折彎(절만) : 꺾다, 꺾이다.
* 外見(외견) : 겉보기. / 如(여) : ~과 같다. / 彼(피) : 저것, 그것.
* 傷處(상처) : 상처, 다친 곳. / 全無(전무) : ~이 전혀 없다.
* 近況(근황) : 근황, 최근의 형편. / 如何(여하) : 무엇과 같은가, 어떠한가?
* 猶(유) : 아직도, 여전히. / 水中乎(수중호) : 물속인가? ‘乎’는 의문을 유도하는 어기사(語氣詞)이다.
[한역의 직역]
굴절
물에 들어가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겉보기에 그 같을 뿐
다친 곳은 전혀 없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도 물속입니까?
[한역노트]
필자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글 가운데 제목과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망원경으로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원숭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보는 시늉을 하다가 망원경을 그 자리에 두고 제법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지켜보고 있으면, 원숭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그 망원경을 가지고 꼭 사람처럼 노는데, 원숭이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에 잽싸게 다가가도 원숭이는 사람을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 잡힐 때까지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스토리였다. 이 이야기가 실화에 기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망원경의 속성을 이용해 원숭이를 잡는다는 설정 자체가 역자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눈 렌즈 망원경을 바로 잡고 보면 먼 곳의 물체가 크고 가깝게 보이지만,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보면 가까운 곳의 물체조차 작고 멀게 보인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망원경을 바로 잡고 보는 것이든 거꾸로 잡고 보는 것이든 모두 정상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우리가 발목을 보는 것도 일상 중에 육안으로 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물속의 발목이 꺾어져 보이는 것은 다친 데가 없다손 치더라도 정상이 아니다. 발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발목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시의 궁극적인 뜻은 결국 발목이 꺾어져 보이게 하는 물속에서 나오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에서 근황을 물으며 “아직 물속입니까?”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뒷받침한다.
발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제는 결국 생각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바른 것이 굽어 보이게 할 수 있는 물속에 발을 두듯, 세상이 굽어 보이게 할 수 있는 어느 생각 속에 나를 두고 있다면 나는 타인에게 오해될 수밖에 없다.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이념 속에만 나를 두고 있다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시야는 그만큼 좁아져, 타인에게는 굽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자는, 이 시에서의 “물”을 외곬스런 어느 한 세계 내지는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에게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하여 서양의 어느 선각자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생각이 곧 운명이 된다니 어찌 생각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우리는 거개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여기에 맞추어 생각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함몰된 생각이 결국 자기중심적인 말을 토해내도록 해서, 급기야 설화(舌禍)를 초래하고 그 업보로 낭패를 겪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되었다. 이른바 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정치인들 사이에도 만만찮게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을 조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욱이, 물속에서 굴절된 발목처럼 상처[다친 곳]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상처로 여기고 그것을 아파하는 경향 또한 없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제대로 보자면 물속에서 발을 뺀 후 내 발을 보듯,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세상인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아직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는 이른 계절이지만,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도 이미 지났으니, 이제 서서히 물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계절이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마음대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시원하게 씻을 수야 없다 하여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목을 적시는 정도는 언제 어디서나 허용되는 자유일 테니, 조용히 탁족(濯足)이나마 즐기며 햇빛 아래서 ‘굴절되는 발목’의 가르침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3행으로 이루어진 단시조인 원시를 역자는 사언(四言) 6구의 고시로 한역(漢譯)하였다. 제2구까지는 매구(每句)에 압운하고 제3구 이하는 짝수구마다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間(간)’, ‘彎(만)’, ‘無(무)’, ‘乎(호)’가 된다.
2023. 4. 25.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굴절
이승은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태헌의 한역]
屈折(굴절)
入水瞬間(입수순간)
脚腕折彎(각완절만)
外見如彼(외견여피)
傷處全無(상처전무)
近況如何(근황여하)
猶水中乎(유수중호)
[주석]
* 屈折(굴절) : 굴절, 휘어서 꺾임.
* 入水(입수) : 물에 들어가다. / 瞬間(순간) : 어떤 일이 일어난 바로 그때, ~하는 순간.
* 脚腕(각완) : 발목. / 折彎(절만) : 꺾다, 꺾이다.
* 外見(외견) : 겉보기. / 如(여) : ~과 같다. / 彼(피) : 저것, 그것.
* 傷處(상처) : 상처, 다친 곳. / 全無(전무) : ~이 전혀 없다.
* 近況(근황) : 근황, 최근의 형편. / 如何(여하) : 무엇과 같은가, 어떠한가?
* 猶(유) : 아직도, 여전히. / 水中乎(수중호) : 물속인가? ‘乎’는 의문을 유도하는 어기사(語氣詞)이다.
[한역의 직역]
굴절
물에 들어가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겉보기에 그 같을 뿐
다친 곳은 전혀 없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도 물속입니까?
[한역노트]
필자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글 가운데 제목과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망원경으로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가 있었다. 원숭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보는 시늉을 하다가 망원경을 그 자리에 두고 제법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지켜보고 있으면, 원숭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그 망원경을 가지고 꼭 사람처럼 노는데, 원숭이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에 잽싸게 다가가도 원숭이는 사람을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 잡힐 때까지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스토리였다. 이 이야기가 실화에 기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망원경의 속성을 이용해 원숭이를 잡는다는 설정 자체가 역자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눈 렌즈 망원경을 바로 잡고 보면 먼 곳의 물체가 크고 가깝게 보이지만,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보면 가까운 곳의 물체조차 작고 멀게 보인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망원경을 바로 잡고 보는 것이든 거꾸로 잡고 보는 것이든 모두 정상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우리가 발목을 보는 것도 일상 중에 육안으로 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물속의 발목이 꺾어져 보이는 것은 다친 데가 없다손 치더라도 정상이 아니다. 발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발목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시의 궁극적인 뜻은 결국 발목이 꺾어져 보이게 하는 물속에서 나오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에서 근황을 물으며 “아직 물속입니까?”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뒷받침한다.
발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제는 결국 생각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바른 것이 굽어 보이게 할 수 있는 물속에 발을 두듯, 세상이 굽어 보이게 할 수 있는 어느 생각 속에 나를 두고 있다면 나는 타인에게 오해될 수밖에 없다.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이념 속에만 나를 두고 있다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시야는 그만큼 좁아져, 타인에게는 굽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자는, 이 시에서의 “물”을 외곬스런 어느 한 세계 내지는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에게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하여 서양의 어느 선각자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생각을 조심하여라. 생각은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여라. 말은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여라. 행동은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여라. 습관은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여라. 인격은 운명이 된다.
생각이 곧 운명이 된다니 어찌 생각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우리는 거개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여기에 맞추어 생각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함몰된 생각이 결국 자기중심적인 말을 토해내도록 해서, 급기야 설화(舌禍)를 초래하고 그 업보로 낭패를 겪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되었다. 이른바 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정치인들 사이에도 만만찮게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을 조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욱이, 물속에서 굴절된 발목처럼 상처[다친 곳]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상처로 여기고 그것을 아파하는 경향 또한 없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제대로 보자면 물속에서 발을 뺀 후 내 발을 보듯,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세상인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아직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는 이른 계절이지만,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도 이미 지났으니, 이제 서서히 물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계절이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마음대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시원하게 씻을 수야 없다 하여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목을 적시는 정도는 언제 어디서나 허용되는 자유일 테니, 조용히 탁족(濯足)이나마 즐기며 햇빛 아래서 ‘굴절되는 발목’의 가르침을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3행으로 이루어진 단시조인 원시를 역자는 사언(四言) 6구의 고시로 한역(漢譯)하였다. 제2구까지는 매구(每句)에 압운하고 제3구 이하는 짝수구마다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間(간)’, ‘彎(만)’, ‘無(무)’, ‘乎(호)’가 된다.
2023. 4. 25.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