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강도에겐 있고, 한국 강도엔 없는 것들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원작을 본 이들은 잊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스페인 조폐국을 점거해 돈을 찍어내기로 모의한 강도들의 리더 ‘교수’가 거사를 앞둔 밤, 형인 ‘베를린’과 잔을 부딪히며 부르는 노래. ‘벨라 차오(Bella ciao)’다.

1940년대 이탈리아의 반파시즘 저항군이 불렀던 민중 가요는 비장하다.

“만약 내가 파르티잔(빨치산)으로 죽는다면 묻어주시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날 아름다운 꽃이라 불러주겠지. 이것은 파르티잔의 꽃이오. 자유를 위해 투쟁한 자의 영혼이 깃든.”

가사를 몰라도 괜찮다. 서로를 응시하며 벨라 차오를 부르는 둘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알 수 있다. 조폐국 강도가 이들에게는 생을 건 숙원이라는 것을.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한국 리메이크작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칭찬보다 비판을 받았다.

리메이크작도 교수(유지태 분)를 중심으로 뭉친 강도단이 조폐국에서 4조원을 훔치는 이야기다.

원작의 큰 줄기를 해치지 않았는데 평가가 박하다. 통일을 앞둔 한반도라는 작중 설정에 대한 시선도 엇갈린다.

한국판 종이의 집에서는 ‘벨라 차오’가 보이지 않는다. 노래가 없었다는 게 아니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장면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강도 계획에 이들은 왜 진심인가. 공권력의 회유와 압박이 거세지고 공범이 죽어나가도 왜 변심하지 않나. 마음을 울리는 답을 얻기 어렵다.

쉽지 않은 일이다. 주인공들의 범죄 과정을 다루는 범죄물(이른바 케이퍼 무비)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그려낼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범죄자이자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을 시청자가 미워하면 안 되지만, 무조건적인 응원은 용납되지 않는다. 시청자는 비판하되 이입해야 한다.

너무 고상했던 한국의 교수

원작은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첫 번째는 교수다. 종이의 집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교수다. 강도를 계획하고 주도하는 교수에 이입해야 극에 몰입한다.

원작의 교수는 처절하다. 조폐국 강도에 삶을 바쳤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몸도 거리낌없이 해친다. 부랑자인 척을 하기 위해 오줌을 지리는 폐차장 신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추적 방지를 위해 국가에 지문을 등록하지 않았고, 조폐국으로 향하는 땅굴을 5년 전에 파놨다는 그의 말은 극 이전의 삶을 가늠케 한다.

신분이 없는 유령 같은 자가 학교를 다니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아끼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겠나.

서사는 선명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가 스페인 은행권으로 번지자 2011년 스페인은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EU로부터 지급된 막대한 양의 유로화는 스페인 은행들로 흘러들어갔다. EU는 대가로 노동개혁을 요구했고 스페인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돈이 없었던 교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털다 경찰의 총에 맞았다. 어린 아들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죽었다.

얼어붙은 교수의 발 앞에 피 묻은 돈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이후 그의 삶은 그날의 기억에 지배당한다.

국가와 은행은 돈을 많이 받았다는데 왜 아버지는 나 때문에 강도질을 하다 죽었나.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조폐국과 돈으로 대표되는 금융 체제는 아버지의 원수다.

강도는 아들이 대신 이뤄주고 싶은 아버지의 염원이자, 원수에 대한 복수다. “강도는 아버지와의 대화”라던 교수의 말은 모든 것을 함축한다.

한국판 교수는 문자 그대로 교수다. 고상한 탈출 장면은 넘어가더라도 교수님이 왜 조폐국 강도를 저질러야 하는지 납득이 쉽사리 가지 않는다.

대기업 회장의 의뢰로 남북경협안을 구상할 만큼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면 경협을 막을 합법적인 방안도 찾지 않았을까.

이산가족이라는 설정, 남북 통일 속 이득을 얻는 정치인과 기업의 실상을 폭로하겠다는 대의는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 왜, 조폐국인가.

낭만의 부재, 득인가 독인가

종이의 집 제작총괄을 맡은 헤수스 콜메나르 감독은 종이의 집 제작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이 강도의 본질은 낭만주의”라고 말했다.

원작은 돈과 금 같은 목적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열정에 집중한다. 보편적인 정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못 이룬 꿈 하나쯤은 묻고 산다.

함께 도전하는 강도들 사이에서는 진한 애정이 피어난다. 도쿄는 경찰들과의 총격전 중 죽음의 위기를 느낀 순간 연인 리우에게 입을 맞추고 사랑을 고백한다.

모스크바의 죽음을 곁에서 지킨 젊은 강도들은 그를 아버지 같은 존재로 회고한다. 서로 맞지 않는 듯하면서도 믿고 의지하는 나이로비와 도쿄의 여성 연대도 있다.

이들은 조폐국에 들어올 때부터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동지다.

한국판에는 사랑이 빠졌다. 러브라인이 축소됐을 뿐 아니라 동지애가 드러나지 않는다. 연출자인 김홍선 감독이 의도한 원작 차별화 전략이다.

효율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은 옳을 수 있다. 다만 강도들이 합심하는 중요한 원동력을 잃었다. 무엇으로 대체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노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