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왜 주인공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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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송한샘의 씨어터 인사이트 (2)
대중문화 공연과 시적 정의
대중문화 공연과 시적 정의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지킬, ‘스위니토드’의 토드, ‘웨스트사이드스토리’의 토니, ‘데스노트’의 라이토,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모두 극의 대미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작품의 창조자인 작가는 대체 왜 그 주인공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객석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멋있어 보이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시적 정의에 어긋나는 작품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인물들의 어떤 행동이 시적 정의에 어긋난 것이며, 그들을 비극적 결말, 그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지킬은 아버지 치료를 위한 실험을 허락해 주지 않는 병원 이사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홍등가 여인 루시를, 이중인격인 ‘하이드’일 때 무참히 죽인다. 토드는 아내와 딸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터핀 판사와 그의 부하 비들은 물론 무고한 사람들마저 죽인다.
패싸움을 말리던 토니는 친구 리프가 상대 패거리의 리더인 베르나르도의 칼에 죽자, 분노 끝에 베르나르도를,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오빠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인다. 고등학생 라이토는 우연히 줍게 된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지의 범죄자를 처단한다.
이쯤 되면 ‘시적 정의’란 극 중에서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 인과응보의 최후를 맞도록 하는 것 정도로 이해될 법하다. 하지만 극 중 인물의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원인에 살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신부의 촛대를 훔치고, 범죄자 신분을 숨긴 채 시장이 되었으며, 경찰 자베르와의 약속을 어기고 자수하러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위해 조국을 배반한 검사의 비리를 파헤치고, 그에게 감금과 폭행을 당했던 부인 이사벨과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자신이 드나들던 ‘벽’안에 갇혀 죽는다.
뮤지컬 ‘베토벤: 시크릿’의 베토벤은 귀족가문의 유부녀 토니를 만나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토니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청력을 상실하고 죽는다. 위 세 경우 모두 살인은 아니다. 장발장의 죄는 절도와 사기 등의 범법이며, 듀티율과 베토벤의 죄는 유부녀와 부정한 사랑을 나눈 것이다.
시적 정의란 주로 극이나 소설 등 서사문학 장르 속의 인과응보와 권선징악, 동양적으로 말한다면 사필귀정의 사상이다. 합리주의가 서구를 지배하던 17세기 중엽 영국의 문학비평가 토머스 라이머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즉,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그 행동의 선악에 따라 결말에서 상벌을 받아야 한다. 또한 극의 행위는 개연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어야 하며 인물들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시적(Poetic)’ 정의라 칭할까?
기원전 4세기 자신의 저서 <시학(Poetics)>에서 플롯과 극작법 이론을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작가를 ‘시인’이라 칭했다. 사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같은 희랍비극부터 16세기 영국 셰익스피어의 <햄릿>, 18세기 독일 괴테의 <파우스트>까지 3000년 가량 문학사의 희곡 대부분은 모두 운문, 즉 시로 쓰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산문 희곡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헨리크 입센과 안톤 체호프를 필두로 근대 사실주의 연극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심지어 산문 문학의 대표격인 소설 역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같은 서사시로 귀착되니, 무릇 서사 장르의 기원은 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 시적 정의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서사 장르에서도 시적 정의가 가장 견고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은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公演)이다. ‘숨김없이 드러낼’ 공(公), ‘멀리 흐를’ 연(演)이라는 한자의 뜻처럼 공연이란 어떠한 이야기, 행동을 숨김없이 널리 알려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공연은 독자 홀로 읽는 소설이나 공연의 설계도 격인 희곡보다도 더 작품의 윤리성이나 공감도가 중요하다. 동일한 시공간에 운집한 관객들이 서로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같은 무대를 감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연 관람 행위와 공감은 작품에의 몰입과 비판적 평가 모두를 필요로 하며,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의 반응, 상호 간의 논쟁을 통해 감상한 내용을 비교해 보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작품의 내용과 주제가 공적 윤리에 위배되거나 정의롭지 않을 때 관객은 불쾌감을 느끼고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결말에서 지킬이 엠마와 행복하게 결혼한다면?
토드가 러빗 부인과 해변에서 행복하게 산다면? 토니가 마리아와 도망가 행복하게 산다면?
라이토가 전세계 범죄자를 모두 처단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이 된다면?
장발장이 끝까지 자수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면?
베토벤과 듀티율이 유부녀인 토니, 이사벨과 행복하게 맺어진다면?
당신은 기립박수로 환호할 수 있을까?
공연의 완성도에 박수는 쳤을지언정 귀갓길 내내 무언가 꺼림칙한 감정을 떨쳐내기 힘들 것이고, 선뜻 주위에 관람을 권유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팍팍한 현실은 결코 17세기 합리주의자들의 바람대로 이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중은 극장 안에서의 두 시간 만큼이라도 시적 정의에 위로 받고 싶은 것 아닐까?
사족 하나. 당신은 이후 접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시적 정의를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환영합니다, 이야기의 수신자가 아닌 발신자의 세계에 오신 것을.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모두 극의 대미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작품의 창조자인 작가는 대체 왜 그 주인공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객석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멋있어 보이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를 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시적 정의에 어긋나는 작품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인물들의 어떤 행동이 시적 정의에 어긋난 것이며, 그들을 비극적 결말, 그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까? 지킬은 아버지 치료를 위한 실험을 허락해 주지 않는 병원 이사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홍등가 여인 루시를, 이중인격인 ‘하이드’일 때 무참히 죽인다. 토드는 아내와 딸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터핀 판사와 그의 부하 비들은 물론 무고한 사람들마저 죽인다.
패싸움을 말리던 토니는 친구 리프가 상대 패거리의 리더인 베르나르도의 칼에 죽자, 분노 끝에 베르나르도를,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아의 오빠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인다. 고등학생 라이토는 우연히 줍게 된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각지의 범죄자를 처단한다.
이쯤 되면 ‘시적 정의’란 극 중에서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 인과응보의 최후를 맞도록 하는 것 정도로 이해될 법하다. 하지만 극 중 인물의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원인에 살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신부의 촛대를 훔치고, 범죄자 신분을 숨긴 채 시장이 되었으며, 경찰 자베르와의 약속을 어기고 자수하러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듀티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위해 조국을 배반한 검사의 비리를 파헤치고, 그에게 감금과 폭행을 당했던 부인 이사벨과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자신이 드나들던 ‘벽’안에 갇혀 죽는다.
뮤지컬 ‘베토벤: 시크릿’의 베토벤은 귀족가문의 유부녀 토니를 만나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토니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청력을 상실하고 죽는다. 위 세 경우 모두 살인은 아니다. 장발장의 죄는 절도와 사기 등의 범법이며, 듀티율과 베토벤의 죄는 유부녀와 부정한 사랑을 나눈 것이다.
시적 정의란 주로 극이나 소설 등 서사문학 장르 속의 인과응보와 권선징악, 동양적으로 말한다면 사필귀정의 사상이다. 합리주의가 서구를 지배하던 17세기 중엽 영국의 문학비평가 토머스 라이머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즉,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그 행동의 선악에 따라 결말에서 상벌을 받아야 한다. 또한 극의 행위는 개연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어야 하며 인물들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시적(Poetic)’ 정의라 칭할까?
기원전 4세기 자신의 저서 <시학(Poetics)>에서 플롯과 극작법 이론을 정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작가를 ‘시인’이라 칭했다. 사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같은 희랍비극부터 16세기 영국 셰익스피어의 <햄릿>, 18세기 독일 괴테의 <파우스트>까지 3000년 가량 문학사의 희곡 대부분은 모두 운문, 즉 시로 쓰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산문 희곡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헨리크 입센과 안톤 체호프를 필두로 근대 사실주의 연극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심지어 산문 문학의 대표격인 소설 역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같은 서사시로 귀착되니, 무릇 서사 장르의 기원은 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 시적 정의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서사 장르에서도 시적 정의가 가장 견고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은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公演)이다. ‘숨김없이 드러낼’ 공(公), ‘멀리 흐를’ 연(演)이라는 한자의 뜻처럼 공연이란 어떠한 이야기, 행동을 숨김없이 널리 알려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공연은 독자 홀로 읽는 소설이나 공연의 설계도 격인 희곡보다도 더 작품의 윤리성이나 공감도가 중요하다. 동일한 시공간에 운집한 관객들이 서로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같은 무대를 감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연 관람 행위와 공감은 작품에의 몰입과 비판적 평가 모두를 필요로 하며,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의 반응, 상호 간의 논쟁을 통해 감상한 내용을 비교해 보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작품의 내용과 주제가 공적 윤리에 위배되거나 정의롭지 않을 때 관객은 불쾌감을 느끼고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결말에서 지킬이 엠마와 행복하게 결혼한다면?
토드가 러빗 부인과 해변에서 행복하게 산다면? 토니가 마리아와 도망가 행복하게 산다면?
라이토가 전세계 범죄자를 모두 처단하고 평범한 고등학생이 된다면?
장발장이 끝까지 자수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면?
베토벤과 듀티율이 유부녀인 토니, 이사벨과 행복하게 맺어진다면?
당신은 기립박수로 환호할 수 있을까?
공연의 완성도에 박수는 쳤을지언정 귀갓길 내내 무언가 꺼림칙한 감정을 떨쳐내기 힘들 것이고, 선뜻 주위에 관람을 권유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팍팍한 현실은 결코 17세기 합리주의자들의 바람대로 이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중은 극장 안에서의 두 시간 만큼이라도 시적 정의에 위로 받고 싶은 것 아닐까?
사족 하나. 당신은 이후 접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시적 정의를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환영합니다, 이야기의 수신자가 아닌 발신자의 세계에 오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