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음악이 흐르는 집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악을 좋아하는 음악광이셨고, 어머니 역시 피아노를 치셨다.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 밑에서 우리 형제는 모두 다 악기를 배웠다.

언니들은 피아노를 쳤고, 큰오빠는 바이올린, 기타, 클라리넷 등 여러 악기를 만졌다. 작은오빠는 피아노와 성악을 시작하다 말았다. 나는 큰오빠의 바이올린을 물려받으며 바이올리니스트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주자 생명 끝" 경고에도…내가 바이올린 선생님 바꾼 이유
그때 내 나이가 만 5세. 멋도 모르고 시작한 바이올린이 나의 평생 동반자가 된 것은 아주 작은 계기로 인해서였다.

바이올린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어느 조그만 콩쿠르에서 3등을 하자, 어머니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시키기 시작했다.

나의 음악적 재능을 처음으로 평가받은 것은 아홉 살 때다. 서울시향이 실시하는 유망 청소년 협연자 오디션에서 우승을 차지해 서울시향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을 협연하며 데뷔한 것이다.

그후 나는 전국 소년소녀 음악경연대회와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1위를 했고, 초등 6학년 때 당시 서울시향 상임지휘자였던 김만복 선생님의 은퇴 공연에 특별 협연자로 선정돼 연주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나의 진로를 확정짓는 첫 번째 계기였다.

나는 이화여중 2학년 때인 196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유학길은 지금과 달리 아주 어렵고 힘들었다. 외국 여행도 쉽지 않았던 시절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나의 유학 기회는 김원모 선생님이 마련해주셨다. 당시 미국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던 김 선생님이 공연차 내한했다가 내 연주를 듣고 도움을 자청한 것이다. 내 연주 테이프는 줄리어드의 이반 갈라미언 선생에게 보내졌고, 제자로 받겠다는 답신이 왔다.

나는 미국 뉴욕에 도착해 갈라미언 선생님의 여름학교인 메도마운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절망을 느꼈다. 미국 생활 3개월 동안 친가족처럼 대해준 미국 가족과 떨어져 홀로 찾아간 캠프엔 텅빈 방에 침대 하나, 장롱 하나가 나를 맞을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내 또래 학생들의 연주를 듣고는 완전 포기 상태에 빠졌다. 그들에 비하면 내 연주 실력은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의 수준에 불과했다.

가야 할 길이 태산같이 험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캠프가 끝나면 갈 곳이 없던 나였다.그후 2주 동안은 완전히 공포 속에서 헤매야 했다.

다행히 갈라미언 선생님이 잘 돌봐주었다. 조수인 파데 선생을 소개해주며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추천해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파데 선생님은 내게 큰 은인이나 다름없다. 그때 쌓은 실력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내게 큰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갈라미언 선생을 만난 이후 나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뉴욕의 고교 졸업생 중 가장 뛰어난 연주자 한 명에게 수여하는 다이아몬드 주불리 상을 수상했다.

갈라미언 선생님은 제자들이 콩쿠르에 나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교육자였다. 제자 중 일부에게만 허용했는데, 나에게 그 기회가 왔다.

1972년 뉴욕의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나는 1975년 워싱턴 국제콩쿠르를 석권하고 곧바로 핀란드에서 열린 시벨리우스 국제콩쿠르에 참가해 4위를 차지했다.

1978년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는 본선 진출에 만족해야 했지만, 1980년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나움버그 국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하며 콩쿠르 도전을 마감했다.

콩쿠르를 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때달았다. 일등을 하는 것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갈라미언 선생님이 항상 콩쿠르에 나가기 바로 전에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

“너는 이미 일등이나 마찬가지다. 콩쿠르 준비를 하면서 열심히 했고, 그만큼 좋은 실력을 키웠으니 나는 너를 일등이라고 본다. 가서 최선을 다해라.”

콩쿠르 후에도 선생님은 절대 등수에 상관하지 않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된 나는 갈라미언 선생님의 그 말씀을 항상 제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연주자 생명 끝" 경고에도…내가 바이올린 선생님 바꾼 이유
대학교 2학년 때다. 당시 나는 굉장히 힘든 결정을 내렸다. 늘 우러러보고 존경했던 갈라미언 선생님 곁을 떠나 딜레이 선생님에게로 옮긴 것이다.

그때 내가 선생님을 바꾼 것은 큰 변화이자 사건이었다. 많은 주위 사람들은 내게 “선생님을 왜 바꾸냐? 그건 배반이다”, “연주자로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라는 등 여러 의견을 말해주었다.

특히 그때 갈라미언 선생님과 딜레이 선생님은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의리를 지켜 갈라미언 선생님 밑에 있다가 졸업할 것인가, 아니면 내 갈 길을 찾아갈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옮기는 쪽으로 결론내렸다.

당시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 동안이나 사사하고 정들었던 갈라미언 선생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은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생각 외로 갈라미언 선생님은 내 결정을 이해해주고, 앞길을 격려해주었다. 그러면서 “왜 딜레이 선생에게 가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너의 음악 발전에 꼭 필요하다면 가거라”라고 했다.

선생님은 “직접 찾아와 얘기해줘서 고맙다. 많은 제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때 편지 한 장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땐 많이 섭섭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딜레이 선생님과의 레슨은 항상 새로웠다. 갈라미언의 엄격한 레슨과 달리 좀더 자유로웠다.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어떤 때는 레슨 시간이 2~3시간 지속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레슨이 대화시간으로 바뀌기도 했다. 친구들 이야기부터 음악 비즈니스, 세상 사는 이야기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딜레이 선생님은 자기의 교육을 갈라미언처럼 ‘메소드’라고 하지 않고 ‘어프로치’(approach)라는 말로 설명한다. 모든 테크닉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방법을 학생 스스로 연구하게 이끌어주는 게 그의 교수법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올린 교육의 양대 산맥으로 칭송받는 갈라미언과 딜레이 교수를 모두 사사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최고의 테크닉과 최고의 음악성을 두루 섭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분의 가르침은 내가 기성 연주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육자로서 학생을 지도하는 데에도 큰 밑바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