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말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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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정 한양대 총장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나온 한 노신사 왈, “역시, 셰익스피어는 영국 영어로 들어야 제맛이군”이라며 일행들 사이에서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17세기 초반까지 생존한 셰익스피어는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1620년 미국 북동부 해안가에 상륙할 때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치는 인물이다. 게다가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는 영국 영어, 미국 영어의 구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후 변방이 된 미국은 영국 본토에서 일어나는 활발한 언어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17세기의 악센트를 비교적 그대로 유지한다.
따라서 만일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는 필시 현대의 영국 영어가 아니라 미국 영어에 훨씬 더 가까운 언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얘기인즉슨 브로드웨이는 관람객에게 뭔가 영국풍의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이고 그 노신사는 극단의 의도에 걸려든 것이 되고 만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명(名)’이 ‘전(傳)’해지는 것이 ‘허(虛)’하지 ‘않다(不)’, 즉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의미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 끊어 읽을 때도 ‘명+불허전’으로 해야 하는데 방송 등을 보면 많은 경우에 ‘명불+허전’으로 하기 일쑤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오페라의 주역 여성 가수를 의미하는 ‘프리마돈나’는 어떻게 경계를 지어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prima donna’의 우리말 음역이니 ‘프리마+돈나’로 읽어야 하겠지만, 이 역시 어떤 이유에선지 ‘프리+마돈나’로 잘못 말하는 경우를 종종 듣는다. 이 글의 독자들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터다.
필자에게 귀한 시간이 됐던 ‘한경에세이’ 마지막 회차에서 구태여 언어학자의 피곤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혹은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필자 역시 글을 쓰며 또는 말을 하며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서다. 사실 내 수업의 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고쳐주기가 무척 곤란한 상황이 아닌가. 오히려 필자의 나누고자 했던 바는 글이야말로, 말이야말로, 그야말로 겸손을 일깨우는 수련의 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둬가며 닦고 닦으며 신중히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화(火)’가 고찰의 시간을 두지 않은 채 그저 내뱉고 보는 말과 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만일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는 필시 현대의 영국 영어가 아니라 미국 영어에 훨씬 더 가까운 언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얘기인즉슨 브로드웨이는 관람객에게 뭔가 영국풍의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이고 그 노신사는 극단의 의도에 걸려든 것이 되고 만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명(名)’이 ‘전(傳)’해지는 것이 ‘허(虛)’하지 ‘않다(不)’, 즉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의미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 끊어 읽을 때도 ‘명+불허전’으로 해야 하는데 방송 등을 보면 많은 경우에 ‘명불+허전’으로 하기 일쑤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오페라의 주역 여성 가수를 의미하는 ‘프리마돈나’는 어떻게 경계를 지어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prima donna’의 우리말 음역이니 ‘프리마+돈나’로 읽어야 하겠지만, 이 역시 어떤 이유에선지 ‘프리+마돈나’로 잘못 말하는 경우를 종종 듣는다. 이 글의 독자들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터다.
필자에게 귀한 시간이 됐던 ‘한경에세이’ 마지막 회차에서 구태여 언어학자의 피곤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혹은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필자 역시 글을 쓰며 또는 말을 하며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서다. 사실 내 수업의 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고쳐주기가 무척 곤란한 상황이 아닌가. 오히려 필자의 나누고자 했던 바는 글이야말로, 말이야말로, 그야말로 겸손을 일깨우는 수련의 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둬가며 닦고 닦으며 신중히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화(火)’가 고찰의 시간을 두지 않은 채 그저 내뱉고 보는 말과 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