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럽과 달리 정부 규제보다 민간의 자율과 혁신을 중시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이런 통념이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큰 정부를 넘어 ‘메가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개입이 늘면서 연방정부의 기능과 예산 등이 역대급으로 팽창했기 때문이다. 각종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보조금·세제 혜택 패키지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자율의 美·규제의 유럽'은 옛말…'메가정부' 밀어붙이는 바이든
부채한도 협상을 둘러싼 미 정치권의 ‘강대강(强對强)’ 대치도 팽창 재정을 통해 정부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민주당과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 간 싸움이다. 공화당은 민주당에 부채한도를 올리려면 연방정부 예산을 깎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백악관은 “공화당의 연계 방안이 상하원을 모두 통과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규제 행동주의’의 귀환

이달 초 미 상무부 산하 통신정보관리청(NTIA)은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을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AI 시스템이 의도대로 작동하는지, 해악을 일으킬 우려는 없는지 등을 검토하겠다는 취지다.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AI 관련 회의를 주재하며 “테크 기업들은 대중에 공개하기 전에 자사 제품을 안전하게 제조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지난달 초엔 세계를 놀라게 한 발표가 미국에서 잇따랐다. 미국의 대형 제약사 일라이릴리가 “올해 4분기부터 인슐린 제품의 정가를 70% 인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후 노보노디스크, 사노피 등 미국의 다른 제약사도 가격 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이들 기업은 글로벌 인슐린 시장을 사실상 장악한 곳이어서 세계 당뇨병 환자들에겐 희소식이었다.

이는 바이든 정부의 ‘팔 비틀기’로 인한 것이다. 작년 상반기 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제약업계를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 뒤 “제약 중개업체들이 불법 뇌물과 리베이트 등을 수수해 제약 제품 가격을 높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 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게 제약업계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은 혁신강국, 유럽은 규제왕국’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이 뒤바뀌고 있다”며 “최근 미국은 빅테크, 제약, 금융과 같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산업군에서 규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대기업이 정부 압박으로 인해 ‘가격 인하’ 같은 백기를 든 사례는 드물다는 점에서 “이번 인슐린 사건은 ‘넛지(nudge·상대의 선택을 유도)’의 대표 사례로 기록될 것”이란 전망도 더했다. 레베카 슬러터 FTC 위원은 “우리는 규제당국의 존재 이유를 ‘소비자를 위해 가격 시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거대 기업과 독과점에 맞서 싸우는 실존적인 측면에서 찾는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우파 성향 싱크탱크 내셔널리뷰는 “2021년 1월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워싱턴DC의 규제기관들에 급격한 변화가 감지됐다”며 “바이든 정부는 반독점, 기후위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사회적 형평성, 디지털화폐 등 모든 분야에서 ‘전체정부(Whole of Government)’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분석했다.

○초대형 팽창예산 편성

미 영리기업연구소(CEI)가 매년 발간하는 보고서에 따르면 그동안 지난해 바이든 정부가 제정한 규칙 등은 총 3168개(예비치)였다. 전년도에는 4429개에 달했다. 미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예비치를 최종 조정하면 바이든 집권 시기에 매년 4000건 이상의 규칙이 제정될 것”이라고 전망한 뒤 ‘규제 행동주의’의 귀환을 짚었다. 특히 “작년 도입된 3168개 규칙(예비치) 중 ‘핵심 규칙’으로 분류되는 규칙은 257개에 달했다”며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 핵심 규칙 수가 연간 80건 내외에 머물렀고, 그나마 가장 많았던 때도 214개에 불과한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고 포브스는 지적했다.

규제 개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바이든 정부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랏돈을 살뜰히 활용하고 있다. 그는 집권 첫해인 2022회계연도(2021년 10월~2022년 9월)에 연방정부 예산으로 6조달러(약 6700조원) 규모의 ‘초대형 팽창 예산’을 짠 바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차대전 이후 최대 수준의 연방정부 지출’이었다. 한술 더 떠 지난달에는 6조9000억달러짜리 2024회계연도(올 10월~내년 9월) 예산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바이든 정부는 미국 제조업 생태계 부활 등을 내세우며 IRA와 인프라법, 반도체칩법 등 3대 국책 공사 법안을 밀어붙였다. 향후 10년에 걸쳐 최대 2조달러가 투입될 초대형 프로젝트들이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의 큰 정부 베팅’이란 기사를 통해 “(뉴딜정책을 통해 미국을 대공황 위기에서 구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정한 후계자는 조 바이든”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전임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도 결국 관철하는 데 실패한 구상을 바이든 대통령이 강행하고 있다”며 “공급망 안정성을 위협하는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굳어지고, 기후위기에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된 게 ‘바이든식 메가 정부’가 용인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