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야…긴 머리에 가죽옷만 입어도 뮤지컬 배우 시켜줬어"
칼럼을 시작하며 ‘어떤 내용으로 첫 칼럼을 시작할까?’ 고민 끝에 나의 뮤지컬 배우 인생의 시작을 첫 내용으로 담아보기로 했다.

자칫 ‘라떼’ 이야기가 될까 싶어 망설였지만 뮤지컬 배우의 칼럼이니만큼 이 내용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 주제를 선택했다. 독자 여러분도 편하게 봐주시길 바란다.

1999년, 나는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를 졸업 후에 동기들과 함께 록 밴드를 만들어 실용음악과 최초로 홍대 클럽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외모를 돌이켜보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4계절 가죽옷을 입고 다니던, 지금까지도 소비되고 있는 전형적인 록커의 모습이었다.

젊은 독자들은 이 모습이 우습고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때는 음악을 한다면 그 정도 외모는 갖추어야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홍대 인디씬에서 주목받는 신인 밴드였던 우리 밴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뮤지컬 오디션을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 제안은 나에게 마치 길에서 만나는 ‘도를 아십니까?’ 같은 제안이었다. 연기도 춤도 춰본 적 없는 나에게 뮤지컬 오디션이라니…. 하지만 노래만 부르면 된다는 말에 호기심이 동하여 원서를 접수하고 말았다.

오디션 당일, 나의 분신이었던 가죽바지와 가죽점퍼 그리고 웨스턴 부츠를 신고 오디션장인 호암 아트홀로 향했다. 오디션 장에 도착한 나는 기획사 직원에게 여기 올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묘한 눈초리를 받으며 배우 대기실을 안내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실 문을 여는 순간, 소란했던 대기실은 순간 정적이 흐르고, 나도 문고리를 잡고 놀란 토끼 눈으로 대기실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커다란 대기실 철문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서로의 낯선 민망함을 뒤로한 채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오디션장에 있던 배우들은 긴 머리의 가죽옷을 입은 록커의 등장에 놀랐고, 나는 영화에서나 보던 형형색색의 헤어밴드와 무용복을 입은 배우들이 다리 찢고 있는 모습에 놀라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오디션을 제안한 분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한 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노래만 부르면 된다는 말에 용기를 내서 다시 대기실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마치 죄인처럼 대기실 구석에 앉아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주변을 살피던 중, 오디션 안무를 배우러 모두 모이라는 말에 얼떨결에 휩쓸려 오디션 장에 들어갔다.

조 안무가 앞에서 시범을 보이면 배우들은 바로 따라 하며 순식간에 어려운 안무를 외워서 해내고 있었다. 나는 제일 구석에 서서 그 모습을 그저 신기하게 바라만 보았다.

잠시 후, 5명씩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오디션 장에 들어갔고 안무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나를 제외한 4명의 배우는 5! 6! 7! 8!의 구호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출 수 없는 나는 뭐라도 해야겠기에 음악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쳤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이제 노래 오디션 시간이다.

다들 뮤지컬 곡을 부르는데 아는 뮤지컬 곡이 없던 나는 당시 애창곡이었던 록 밴드 Eagles의 ‘Desperado’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앞에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이 관심을 보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1차 오디션에 합격했으니 2차 연기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1차에 합격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연기 오디션이라니….

연기는 어릴 적 교회에서 성극을 한 번 해본 것이 전부인지라 앞이 막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디션에 가서 열심히 해보았다.

며칠 후, 오디션에 합격했으니 계약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난생 첫 오디션을 통해 데뷔하게 된 작품은 뮤지컬 ‘록 햄릿’이란 작품이었고 나는 ‘레어티스’ 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에 연출님에게 왜 뮤지컬 경험이 전혀 없는 나를 뽑았는지 물었다. 연출님은 당시에 햄릿 역에 가수 신성우 형이 캐스팅되어 있었고, 햄릿과 레어티스가 함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지막 결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뮤지컬 넘버도 모두 록 음악이니 기존 뮤지컬 배우가 아닌 록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록커가 레어티스 역을 맡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관계자들에게 홍대 클럽에 가서 긴 머리의 록커들에게 오디션을 제안하라고 시켰고, 내가 그 이미지에 제일 잘 맞아서 뽑은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 긴 머리와 가죽옷 그리고 걸걸한 목소리가 합격의 이유였다. 그렇게 난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뮤지컬 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뮤지컬 데뷔는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 같다.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는 뮤지컬도, 뮤지컬 배우도 얼마 없던 시절이었고, 인디 밴드의 보컬이 대극장 뮤지컬의 주연을 맡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의 뮤지컬 시장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해졌고, 배우들의 역량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다.

대학에는 뮤지컬 학과와 뮤지컬 전공이 생겨났고,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넘쳐난다. 대극장 뮤지컬 오디션에는 수천 명씩 지원을 하고 있다.

그만큼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이제는 나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로 데뷔하는 일은 정말 꿈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나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쌓는 취준생보다 더 혹독하게 준비하고 훈련해야 데뷔할 수 있는 시절이라고 가르친다.

충동적이 아닌 계획적으로, 구체적인 훈련 시간표를 짜서 많은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땀 흘리고 있을 후배들이 연기, 노래, 춤, 이 모두를 골고루 잘 훈련해서 언제가 찾아올 기회를 꼭 잡기를 바라고, 멋진 무대 위에 서는 그날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