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CES에서 무척 재미있는 세션이 있었다. 윌슨 오디오의 와트퍼피 7인나 카르마 같은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들이 전시된 가운데 노구의 스피커 한 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

앰프는 미국의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 메이커인 LAMM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스피커는 바이타복스 CN1911 혼 스피커가 유령처럼 있었다.

1947년 미국의 클립쉬혼을 변형해 설계한 스피커로 코너혼 타입 스피커다. 이제 곧 80살이 될 스피커였지만 그 위용이 대단해 당시 CES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빈티지 오디오는 8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보내줬다
얼마 전엔 평소 가끔 와인 한잔이 생각날 때면 들러서 음악과 함께 목을 축이곤 하는 바에서 비오노르를 만났다. 집채만한 높이에 떡 벌어진 어깨,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뻗어가는 고역은 혼이고 그 아래 배플 중앙엔 두 개의 베이스 우퍼가 설치되어 있다.

다름 아닌 클랑필름의 비오노르라는 스피커다. 영국에 바이타복스, 미국에 웨스턴이 있다면 독일엔 클랑필름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만들어진 스피커를 보면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게 된다.

국내에도 독일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들이 꽤 있다. 특히 가라드, 토렌스, EMT 등 턴테이블은 꽤 많이 보이는 편이다. 오래된 기기지만 주인장이 낡은 부품을 교체하고 베이스를 새로 만들기도 하며 톤암을 두 개씩 장착해 새 것처럼 만들어 쓰곤 한다.

하지만 너무 큰 사이즈 때문에 비오노르 같은 빈티지 스피커는 좀처럼 직접 구경하기 힘들다. 비오노르를 보자마자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서 여러 음악들을 신청해 듣다가 직접 선곡에 나서기도 했다.
빈티지 오디오는 8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보내줬다
직접 들어본 비오노르는 생긴 것과 달리 무척 부드럽고 풍부한 배음과 잔향이 일품이었다. 한창 비오노르에 심취해 있다가 또 하나의 스피커가 표적이 되었다.

바로 빈티지 마니아라면 모를 리 없는 파라곤이다. 파라곤이야 워낙 유명해서 몇 몇 장소에서 이미 들어봤지만 이곳에 설치된 파라곤은 좀 다르다. 오리지널 유닛을 가지고 국내에서 새로 짠 인클로저에 담은 것.

완성도가 상당히 훌륭해 설령 유닛이 망가져 소리가 안 나오더라도 집에 한 대 갖고 싶을 지경이다. 소리 또한 비오노르에 비하면 웅장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나름의 매력이 철철 넘쳤다. 특히 1950년대 재즈 보컬을 듣고 있자면 망중한에 빠지기 십상이다.

소스기기 쪽에서는 독일의 대표적인 턴테이블 브랜드 EMT 그리고 디지털은 메리디안 울트라 DAC이 버티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앰프 시스템.

마이학 프리 외엔 거의 모두 진공관과 트랜스 등을 따로 공수해 전문가가 만든 제품들인데 바이앰핑으로 설치해놓은 모습이다. 채 10와트도 안되는 출력으로 비오노르와 파라곤을 통해 만들어내는 부드럽고 풍부한 사운드가 정말 매력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78년이 지났다. 그리고 비오노르가 탄생한지 76년이 흘렀다. 그 당시엔 상상도 못했던 기술 발전이 있었고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변했다.

하지만 음악은 그대로다. 새로운 양식의 음악이 나오고 녹음 방식도 바뀌었지만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저 음악에서 위로 받고 흥에 겨워한다. 기쁠 땐 기쁨을 증폭하며 우울할 때 우울을 묽게 희석시켜준다. 종종 카타르시스에 몸서리치면서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필자는 종종 최신 하이파이 오디오 제품을 리뷰한다. 이젠 바이타복스, 비오노르, 파라곤 같은 설계의 스피커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닛은 작아졌고 감도가 낮아져 3와트, 5와트 정도 소출력 진공관 앰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스피커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제대로 매칭한 하이엔드 스피커의 소리는 정교하며 입체적이다. 가수가 내 앞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노래하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가격은 과거에 비해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지 오래다. 그렇지만 종종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고색창연한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고 그것이 진정 음악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시계가 땡~ 하고 자정을 가리키자마자 주인공 앞에 클래식 푸조가 나타난다. 때는 1920년대. 푸조가 데려간 공간에서 꿈에서나 볼 법한 아티스트가 곁에 있다.

피카소와 달리 등 갤러리에서나 보던 그림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옆으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진한 농담을 섞어가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가 콜 포터의 ‘레츠 두 잇’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조만간 비오노르를 다시 들으러 가야겠다. 풍채 좋은 비오노르가 펼쳐놓는 음악 그리고 음향엔 지금은 절대 체험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정서를 가슴에 풍부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를 통한 시간 여행이랄까.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떠나간 이네즈가 불현 듯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그리고 음악과 음향에 대한 새로운 의욕도 불끈 솟아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