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난방비 폭등에도 버텨…일제강점기 목욕탕이 원조
서울올림픽 후 청결 의식 바뀌고 현대화 공사한 시기 '최호황기' 누려
100년 전통 울산 장수탕…"문 닫을까 봐 동네 이웃들이 더 걱정"
"문 닫으면 동네 할머니들은 다리가 아파도 멀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목욕탕 없어질까 봐 주인인 저보다 더 걱정하지요.

"
코로나19와 난방비 폭등 등으로 동네목욕탕이 하나, 둘 사라져 가지만 수십 년 넘게 풍파를 견디며 문을 여는 곳도 있다.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대중목욕탕인 동구 방어진 '장수탕'도 그런 곳이다.

목욕비는 일반 7천원, 어린이(0∼7세) 4천원.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일반 목욕비는 6천원이었다.

난방비가 많이 들면서 3월 1일부터 1천원을 올렸다.

목욕탕 물은 전기로 데운다.

전기요금이 많게는 180만원(겨울철 기준) 정도 나온다.

장수탕 주인 배옥연(77) 할머니는 "전기요금에다가 수도 요금 내고, 뭐 내고 하면 사실은 적자다"며 "재작년 겨울에는 전기요금이 150만원 정도 나왔는데, 지난 겨울 요금이 오르면서 30만원 정도 더 나왔다"고 1일 말했다.

그는 "그나마 나 혼자 일하니까 인건비가 안 들고 노인 기초연금을 보태서 현상 유지는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손님 중 낯선 이는 거의 없다.

하루걸러 하루 오다시피 하는 이웃이 대부분이다.

배 할머니는 "가장 어린 손님이 60대다"며 "모두 노인이다 보니 매년 단골이 2, 3명씩 줄어간다"고 말했다.

그나마 남탕은 손님이 없어 7년 전쯤 아예 영업을 중단했다.

지금은 여탕만 손님을 받는다.

100년 전통 울산 장수탕…"문 닫을까 봐 동네 이웃들이 더 걱정"
장수탕도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때가 있었다.

배 할머니가 시집온 1960년대 후반에만 해도 방어진에는 목욕탕이 장수탕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톱밥과 나무로 불을 때 목욕탕 물을 데우고, 버스도 제대로 다니지 않던 시절, 7㎞가량 떨어진 다른 동네에서도 손님이 찾아왔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는 탕이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가득 찬 탓에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어 아예 문을 걸어 잠기도 했다고 배 할머니는 회상했다.

장수탕 최호황기는 현대화 공사를 한 1992년 이후다.

배 할머니는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인지, 청결 의식이 바뀌면서 대중목욕탕에 손님이 많이 늘었던 때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100만원 정도를 번 적도 있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피트니스센터 등을 갖춘 신식 사우나 등이 많아진 데다가 유지비 부담도 많이 늘어나면서 배 할머니도 장수탕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는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당장이라도 손을 놓고 싶을 때도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장수탕이 없어지면 동네 할머니들이 다른 동네까지 나가서 목욕해야 하니 마음 편히 접을 수도 없다"고 웃어 보였다.

배 할머니가 장수탕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수탕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울산 지역 사료에 따르면 당시 방어진에는 어업을 위해 정착한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수산회사 하야시카네(林兼)가 1915년 설립되면서 직원들을 위한 사택을 여러 동 지었고, 인근에는 직원 전용 목욕탕이 들어섰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물러나고 목욕탕은 그대로 남았는데, 배 할머니의 시아버지인 고(故) 이종기 씨가 불하받아 대중목욕탕으로 운영한 것이 지금의 장수탕이다.

광복 후 곧바로 장수탕이 생긴 것은 아니고, 196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 대중목욕탕 영업 신고 제도가 시행되면서 장수탕도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00년 전통 울산 장수탕…"문 닫을까 봐 동네 이웃들이 더 걱정"
장수탕 영업신고일은 1963년 12월 15일이다.

울산에서 현재 운영 중인 목욕탕 중에선 가장 오래됐다.

신고일 기준으로 장수탕보다 앞선 곳은 중구 옥교동에 '옥천탕'(1963년 6월 1일 신고)이 있었는데, 1991년 폐업했다.

울산시문화원연합회가 펴낸 '울산의 목욕문화' 집필진인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은 "울산이 1960년대 특정 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당시 울산역이 있던 중구 옥교동에서 먼저 목욕탕 영업 신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방어진은 당시 행정적으로도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늦다"고 설명했다.

장 소장은 "목욕탕 전통 그 자체로 보면 장수탕이 가장 역사가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는 "방어진에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목욕탕이 5곳 정도 있었는데, 장수탕을 제외하면 모두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