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아침에 출퇴근을 사유하다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근로자의 날(노동절) 아침 출퇴근의 기쁨과 슬픔과 보람은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한다. 노동은 항상 생계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노동이 개별자의 생활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세계를 지탱하고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노동 없는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그 믿음의 물증이다. 하지만 땀 흘리는 노동이 보람에서 멀어지고 생의 의미를 낳는 원천이 되지 못한 채 저주의 주문으로 전락하는 순간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사회는 불행에 빠진다.

출퇴근의 역사는 근대 이후 사무실이 밀집한 도시와 교외의 집들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두 세기 동안 정보와 자본이 집중되어 있는 도심에 배치되어 있는 사무실로 이동했다.

만일 몇 백만 인구가 동시에 출근하기 위해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우주에서 본다면 그것은 유동하는 세계의 장엄한 흐름이었을 테다.

도로 정체와 만성적으로 만원 사태를 빚는 대중교통의 과밀과 복잡함을 뚫고 일터로 나가면서 우리는 사냥꾼처럼 다소 비장해진다. 우리의 일터는 각자도생의 경쟁이 이루어지는 정글이나 다름없다. 이 정글에서 포획할 사냥감은 노루나 토끼 따위의 동물이 아니라 각자가 ‘업무 성과’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글의 사냥꾼처럼 비장해지고

오늘날 출근이 연출하는 군중의 대이동은 오디세이의 모험에 견줄 만하다. 출퇴근의 모험을 매혹적인 우주여행에 견주는 건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권과 서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하철과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지하철의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들의 압박감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날마다 갈비뼈가 눌리고 폐와 심장이 터질 듯한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며 출퇴근의 불편을 견디는 것은 그것이 의미를 생산하는 사회적 의례이자 절차이고, 일을 통해 존재 증명을 해내며,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의 흩뿌림이기 때문이다.

그런 긍정의 맥락에서 출퇴근은 취업 경쟁에서 승리한 자의 보람찬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출퇴근의 의례에서 이탈해 집에서 내내 빈둥거린다면 실업자나 낙오자, 자발적 은둔자인 ‘히키코모리’, 고립된 ‘늑대 인간’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출퇴근은 한마디로 노동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리추얼이다. 나도 출퇴근의 규범에 맞춰 살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내 생의 기쁨과 슬픔, 보람에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는 2000만 명이 넘는다. 다양한 회사에 소속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출퇴근이라는 일정한 리듬 속에서 일과가 구성된다는 것, 고용주가 주는 월급과 제 시간을 맞교환하며 임금 노동자로 산다는 뜻이다.

내 출퇴근의 역사는 열다섯 해 정도로 평생 직장생활을 수행한 이들에 견주자면 너무 짧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회사에 목숨을 거는 ‘효율성의 화신’은 아니었지만 회사 업무에 성실한 편이었다.

업무 시간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한동안 업무 역량을 키우기 위해 잠을 줄이고 새벽에 영어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스물을 갓 넘겨 입사한 첫 직장은 직원이 열 명 미만인 소규모 오퍼상이었다. 오퍼상이란 수입상에게서 생산 의뢰를 받은 제품을 지방 공장에 하청을 주고 수출하는 무역 중개상이다.

그 회사는 주로 머그잔, 커피잔, 디너 세트, 공중에 거는 화분, 맥주컵, 장난감 따위의 도자 제품들을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웨덴 같은 유럽 국가로 수출했다. 나는 원산지증명서와 화학검사소의 증명서를 발급받고, 수입신용장에 따라 해운회사를 연결해 수출 물품을 컨테이너 선박에 싣고 선하증권을 발급받아 수출서류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

나는 스미스코로나 영문 타자기로 네고(negotiate) 문서를 작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자기를 다루는 일이 숙달되니 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타자기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에 몰두할 때 고요한 사무실에 타타타닥 타타타닥 울려 퍼지는 타음(打音)이 내 청각에는 악기 연주처럼 경쾌하게 들렸다. 처음 정규직 일자리를 얻은 터라 출퇴근의 불편조차도 내게는 스트레스나 간헐적 분노조절 장애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다.

삶이 의미로 꽉 차 있다는 믿음도

내가 두 번째로 들어간 직장은 출판사였다. 누군가의 천거를 받아 입사한 출판사 편집부 소속으로 원고의 교정 교열을 맡아 하다가 나중에는 인쇄소에 나가 인쇄 감리를 보는 등 제작 관리까지 업무 영역이 늘었다.

출판사에서 새 책의 출간 기획을 하고, 보도 자료와 광고 카피를 도맡아 쓰며 일하는 세 해 동안 아침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탔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버스는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늘 꽉 찬 채로 운행했다.

그 시절 출퇴근은 내 삶이 의미로 꽉 차 있다는 믿음과 함께 보람과 희망으로 범벅된 경험이었다. 나는 출퇴근 때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불렀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출퇴근은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치르는 통과의례이고, 가족이나 자기 생계의 책임을 짊어진 자의 긍지를 심어주는 세속의 규범이며, 제 삶을 좋은 방향으로 견인하는 기회의 보장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나는 사십대에 이르러 집과 작업실이 분리되지 않는 전업작가로 살면서 출퇴근이라는 직장인의 생활방식, 여가의 패턴, 사고와 정서를 규정하는 불가피한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개인의 삶과 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태였던 출퇴근의 관행과 틀은 오랜 세월 변화의 기미 없이 견고한 채로 이어져 왔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콘크리트 건물처럼 견고한 출퇴근 문화는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원격 소통이 가능한 탓에 재택근무가 늘고 탄력근무제라는 다소 느슨한 형태의 출퇴근 제도가 도입되는 게 그 증거다.

언젠가는 우리 삶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동시에 품은 출퇴근의 역사가 끝날지도 모른다. 출퇴근이라는 리추얼이 종말을 맞은 뒤 우리의 감정생활과 일상의 시간들은 어떤 변화를 맞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