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夢魂(몽혼), 李玉峰(이옥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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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원시]
夢魂(몽혼)
李玉峰(이옥봉)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주석]
* 夢魂(몽혼) : 꿈속의 넋.
* 李玉峰(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서출(庶出)이었던 그녀는 15세에 본인이 원한 바대로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버림을 받았으며, 난리 도중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시 32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 近來(근래) : 요사이, 요즈음. / 安否(안부) : 안부. / 問如何(문여하) : 어떠한지를 묻다. ※ 이 구절에 쓰인 동사인 ‘問’은 시구 맨 앞에 놓여야 하나 시의 운율과 구법 등의 이유로 ‘如何’ 앞에 삽입되었다.
* 月到(월도) : 달이 ~에 이르다. / 紗窓(사창) : 비단 등의 가는 실로 짠 천을 바른 창. 간략히 비단 창문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 妾恨多(첩한다) : 이 몸의 한스러움이 많다. 이 대목의 ‘妾’은 자신의 신분이 첩이어서 칭한 말이 아니라, 옛날의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자신을 겸손하게 칭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황후도 황제 앞에서는 자신을 신첩(臣妾)으로 칭하였다.
* 若使(약사) : 만약, 만일. / 行有跡(행유적) : 다니는 길에 흔적이 있다, 다니는 길에 흔적이 남다.
* 門前(문전) : 문 앞. / 石路(석로) : 돌길. / 半(반) : 반, 반쯤. / 成沙(성사) : 모래가 되다.
[태헌의 번역]
꿈속의 넋
요사이 안부가 어떠신지
여쭈어 봅니다.
달이 비단 창문에 이를 때면
이내 몸은 한스러움이 많답니다.
만일 꿈속의 넋이 다니는 길에
흔적이 있는 것이라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겠지요.
[한역노트]
시로 편지를 대신한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역자는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인 이옥봉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옥봉의 이 시를 읽거나 생각하노라면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이 거의 자동으로 따라와, 까마득한 후인인 역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또 어김없이 북경(北京)의 어느 술집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게 한다.
역자는 1994년도 여름에 중국 교육부 초청으로 북경어언학원에서 2개월 가량 중국어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기간에 알게 되어 술자리까지 가졌던 그리 많지 않은 중국인들과, 역자와 마찬가지로 초청되었던 다른 나라 몇몇 학자들에게, 역자가 소개했던 우리 선조들의 시는 총 세 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시였다.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당시 반응은, 역자가 회차(回次)를 달리 하여 소개할 때마다 거의 폭발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래만이 만국어(萬國語)가 아니라 시 역시 만국어가 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느꼈던, 짜차이[榨菜]가 유달리 맛있었던 그 북경의 술집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몇몇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은 이 시를 적어가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자국(自國)에서 어떤 경로로든 이 시를 소개했는지 하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겨우 두 달 정도를 알고 지냈던 사이였을 뿐이어도, 그 순간을 함께 했던 그들 모두가 이 시를 오래도록 기억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시를 살펴보기에 앞서 옥봉의 남다른 이력에 대해 좀 더 소상히 알아보기로 한다. 선조(宣祖)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소실의 딸)로 태어난 옥봉은 천성적으로 영특하고 명민하였으며, 부친에게서 배운 시로 부친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옥봉은 번듯한 반가(班家)에 정식 중매조차 넣을 수가 없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옥봉은, 학식이 있고 인품이 곧은 사람으로 정평이 난 훈남 조원(趙瑗)을 길거리에서 한 번 보고는 그의 소실(小室)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딸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이봉이 직접 조원을 찾아가 딸을 소실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했지만, 옥봉은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친 이봉이 이번에는 조원의 장인인 판서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마침내 옥봉을 조원의 소실로 시집갈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소실로 들어간 옥봉이 옛날 어느 나라 공주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오늘 소개한 시가 지어지기 한 참 전에, 옥봉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 하나와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에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된 산지기의 처(妻)가 주인집 소실이었던 옥봉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 임시에 옥봉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관찰사에게 바쳤다고 한다.
爲人訟寃(위인송원)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
남을 위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다
세숫대야를 거울 삼아 얼굴 씻고
물을 기름 삼아 머리 빗나니
이내 몸이 직녀가 아니거늘
낭군이 어찌 견우겠습니까?
소도둑을 견우[소를 끌고 간다는 뜻]로 보고 시상(詩想)을 전개한, 옥봉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이 시로 인하여 산지기는 마침내 누명을 벗고 풀려났으나, 정작 옥봉 자신은 남편인 조원에게 미움을 사 친정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늘 소개한 이 <夢魂(몽혼)>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불러주기를 고대하는 간절한 심사를 담아 지은 시였다.
시의 첫 번째 구절은 안부를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궁금증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 구절은 자신의 소식을 대신하여 당시의 심사를 전한 것이다. 그 심사의 표현인 “妾恨多(첩한다)”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바로 세 번째 구절과 네 번째 구절이다. 도대체 꿈속의 넋이 얼마나 남편을 찾으러 다녔으면 문 앞 돌길의 돌들이 바스러져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을까? 이토록 멋들어진 비유로 구현(具現)한 시인의 마음자리가 어디 비할 데 없이 그저 애틋하기만 하다. 몇몇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무릎을 쳤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조원은 이 시를 받은 이후에도 옥봉을 부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원의 무심함과 가혹함을 질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조원이 자신의 첩인 옥봉을 질투해서 그런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어느 것도 단언할 수가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을, 그것도 내밀한 애정사를 누군들 쉽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심사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둘 사이의 애정사를 기록해둔 조각 글 하나 없는데, 둘의 애정에 대하여 누가 이러쿵저러쿵 가볍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조원은 자신의 소실이었던 옥봉을 끝내 부르지 않았고, 옥봉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의 와중에 불행하게도 생을 마감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실만이 남아 지금껏 후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니, 어디 객관적인 사실 뿐일까?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칭해도 손색이 없을 이 시까지 남아, 옥봉의 안타까운 심사가 두고두고 독자의 마음을 아리게 하니, 시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에까지 시명(詩名)이 알려졌던 옥봉의 시는 명(明)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와 함께 나란히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늘 소개한 이옥봉 시인의 시는 칠언절구이며 압운자는 ‘何(하)’, ‘多(다)’, ‘沙(사)’이다.
2023. 5. 9.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夢魂(몽혼)
李玉峰(이옥봉)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주석]
* 夢魂(몽혼) : 꿈속의 넋.
* 李玉峰(이옥봉) :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서출(庶出)이었던 그녀는 15세에 본인이 원한 바대로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버림을 받았으며, 난리 도중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시 32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 近來(근래) : 요사이, 요즈음. / 安否(안부) : 안부. / 問如何(문여하) : 어떠한지를 묻다. ※ 이 구절에 쓰인 동사인 ‘問’은 시구 맨 앞에 놓여야 하나 시의 운율과 구법 등의 이유로 ‘如何’ 앞에 삽입되었다.
* 月到(월도) : 달이 ~에 이르다. / 紗窓(사창) : 비단 등의 가는 실로 짠 천을 바른 창. 간략히 비단 창문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 妾恨多(첩한다) : 이 몸의 한스러움이 많다. 이 대목의 ‘妾’은 자신의 신분이 첩이어서 칭한 말이 아니라, 옛날의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자신을 겸손하게 칭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황후도 황제 앞에서는 자신을 신첩(臣妾)으로 칭하였다.
* 若使(약사) : 만약, 만일. / 行有跡(행유적) : 다니는 길에 흔적이 있다, 다니는 길에 흔적이 남다.
* 門前(문전) : 문 앞. / 石路(석로) : 돌길. / 半(반) : 반, 반쯤. / 成沙(성사) : 모래가 되다.
[태헌의 번역]
꿈속의 넋
요사이 안부가 어떠신지
여쭈어 봅니다.
달이 비단 창문에 이를 때면
이내 몸은 한스러움이 많답니다.
만일 꿈속의 넋이 다니는 길에
흔적이 있는 것이라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겠지요.
[한역노트]
시로 편지를 대신한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역자는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인 이옥봉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옥봉의 이 시를 읽거나 생각하노라면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이 거의 자동으로 따라와, 까마득한 후인인 역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또 어김없이 북경(北京)의 어느 술집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게 한다.
역자는 1994년도 여름에 중국 교육부 초청으로 북경어언학원에서 2개월 가량 중국어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기간에 알게 되어 술자리까지 가졌던 그리 많지 않은 중국인들과, 역자와 마찬가지로 초청되었던 다른 나라 몇몇 학자들에게, 역자가 소개했던 우리 선조들의 시는 총 세 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시였다.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당시 반응은, 역자가 회차(回次)를 달리 하여 소개할 때마다 거의 폭발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래만이 만국어(萬國語)가 아니라 시 역시 만국어가 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느꼈던, 짜차이[榨菜]가 유달리 맛있었던 그 북경의 술집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몇몇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은 이 시를 적어가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자국(自國)에서 어떤 경로로든 이 시를 소개했는지 하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겨우 두 달 정도를 알고 지냈던 사이였을 뿐이어도, 그 순간을 함께 했던 그들 모두가 이 시를 오래도록 기억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시를 살펴보기에 앞서 옥봉의 남다른 이력에 대해 좀 더 소상히 알아보기로 한다. 선조(宣祖)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소실의 딸)로 태어난 옥봉은 천성적으로 영특하고 명민하였으며, 부친에게서 배운 시로 부친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옥봉은 번듯한 반가(班家)에 정식 중매조차 넣을 수가 없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옥봉은, 학식이 있고 인품이 곧은 사람으로 정평이 난 훈남 조원(趙瑗)을 길거리에서 한 번 보고는 그의 소실(小室)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딸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이봉이 직접 조원을 찾아가 딸을 소실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했지만, 옥봉은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친 이봉이 이번에는 조원의 장인인 판서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마침내 옥봉을 조원의 소실로 시집갈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소실로 들어간 옥봉이 옛날 어느 나라 공주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오늘 소개한 시가 지어지기 한 참 전에, 옥봉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 하나와 운명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에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된 산지기의 처(妻)가 주인집 소실이었던 옥봉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 임시에 옥봉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관찰사에게 바쳤다고 한다.
爲人訟寃(위인송원)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
남을 위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다
세숫대야를 거울 삼아 얼굴 씻고
물을 기름 삼아 머리 빗나니
이내 몸이 직녀가 아니거늘
낭군이 어찌 견우겠습니까?
소도둑을 견우[소를 끌고 간다는 뜻]로 보고 시상(詩想)을 전개한, 옥봉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이 시로 인하여 산지기는 마침내 누명을 벗고 풀려났으나, 정작 옥봉 자신은 남편인 조원에게 미움을 사 친정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늘 소개한 이 <夢魂(몽혼)>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불러주기를 고대하는 간절한 심사를 담아 지은 시였다.
시의 첫 번째 구절은 안부를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궁금증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 구절은 자신의 소식을 대신하여 당시의 심사를 전한 것이다. 그 심사의 표현인 “妾恨多(첩한다)”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바로 세 번째 구절과 네 번째 구절이다. 도대체 꿈속의 넋이 얼마나 남편을 찾으러 다녔으면 문 앞 돌길의 돌들이 바스러져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을까? 이토록 멋들어진 비유로 구현(具現)한 시인의 마음자리가 어디 비할 데 없이 그저 애틋하기만 하다. 몇몇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무릎을 쳤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조원은 이 시를 받은 이후에도 옥봉을 부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원의 무심함과 가혹함을 질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조원이 자신의 첩인 옥봉을 질투해서 그런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어느 것도 단언할 수가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을, 그것도 내밀한 애정사를 누군들 쉽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심사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둘 사이의 애정사를 기록해둔 조각 글 하나 없는데, 둘의 애정에 대하여 누가 이러쿵저러쿵 가볍게 말할 수 있겠는가!
조원은 자신의 소실이었던 옥봉을 끝내 부르지 않았고, 옥봉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의 와중에 불행하게도 생을 마감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실만이 남아 지금껏 후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니, 어디 객관적인 사실 뿐일까?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칭해도 손색이 없을 이 시까지 남아, 옥봉의 안타까운 심사가 두고두고 독자의 마음을 아리게 하니, 시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에까지 시명(詩名)이 알려졌던 옥봉의 시는 명(明)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와 함께 나란히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늘 소개한 이옥봉 시인의 시는 칠언절구이며 압운자는 ‘何(하)’, ‘多(다)’, ‘沙(사)’이다.
2023. 5. 9.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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