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에게 '21세기 왕실'이란 [별 볼일 있는 OTT]
지난 6일 대관식을 치른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지명된 건 그의 나이 4세 때인 1952년이었다. 이처럼 영국 왕실 사람들에겐 ‘왕위 계승 순위’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정해진 예절 교육을 받아야 한다. 여기엔 ‘왕이 식사를 마치면 다른 사람은 음식을 더 먹을 수 없다’는 황당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절대왕정 시절 얘기가 아니다. 지금 영국 왕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국 왕은 직접 통치하지 않지만, ‘나라의 얼굴’로 정치·경제·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왕실의 경사와 애사에 모든 영국인이 울고 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주제에서 벗어난 지 100년도 더 지난 한국에선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뒤따른다. 영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왕실의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걸까.

올초 국내에 나온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해리와 메건’(사진)은 이런 궁금증을 일부 풀어준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오자마자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영국 왕실을 뛰쳐나온 해리 왕자와 그의 부인인 메건 마클이 ‘왕실의 민낯’을 폭로하는 게 주 내용이라서다.

다큐는 6부작에 걸쳐 해리와 메건, 역사학자 등의 입을 빌려 영국 왕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한다. 다큐에서 그려지는 영국 왕실의 모습은 복합적이다. 왕은 영국 사람들에게 ‘영국의 상징’, 그 자체다.

동시에 왕실은 가십의 중심에 서 있다. 영국 언론들은 왕족의 사생활과 일거수일투족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대중은 이를 가십으로 소비한다. 왕실과 영국 타블로이드 언론과의 관계 때문이다. 영국 왕실에는 특정 언론사에 왕실에 관한 기사를 먼저 보도할 권리를 주는 ‘로열 로타’ 시스템이 있다. 해리 왕자는 다큐에서 “로열 로타에 속한 언론사는 ‘텔레그래프’를 제외하고는 전부 타블로이드”라고 주장한다.

다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왕실의 이중적인 면모를 용감하게 폭로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결국엔 왕실을 이용한 콘텐츠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 다큐가 21세기 영국에서 왕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유용한 기록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