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6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열렸다. 작년 9월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한 뒤 70년 만에 치러진 찰스 3세의 대관식에는 국가 원수급 약 100명을 포함해 세계 203개국 대표가 참석했다. 주요 매체들은 찰스 국왕의 대관식을 ‘21세기판 전래동화’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한 TV쇼’로 묘사하며 생중계했다. 왕실에 비판적인 미국의 진보 성향 매체도 소외된 해리 왕자 소식을 크게 내보내는 등 자국 행사처럼 보도해 역사적·정신적 일체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왕실이 다양한 종교와 인종을 포용하는 등 현대적 요소를 적극 반영하면서 앞으로도 상징적 역할을 지속할 것으로 외신들은 전망했다.

서방 세계 ‘정신적 일체감’ 재확인

이날 버킹엄궁에서 출발한 찰스 3세 부부는 마차와 호위대 약 200명 등으로 구성된 행렬을 이끌고 트래펄가 광장을 거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도착해 대관식을 했다. 1066년 윌리엄 1세부터 이곳에서 대관식을 시작했으며, 찰스 3세는 40번째로 대관식을 치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질 바이든 여사가 참석했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자리를 지켰다. 한국 정부 대표로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유럽 4개국 순방 일정 가운데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 영국에 뿌리를 둔 국가들의 언론은 상당한 지면과 방송 시간을 할애해 찰스 3세의 대관식을 보도했다. 자메이카와 파푸아뉴기니 등 14개 영연방 왕국과 식민지였던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 국왕이 자동으로 국가 원수가 되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을 제외한 곳에선 헌법을 개정해 ‘여왕’을 ‘왕’으로 수정해야 하는 등 실질적·상징적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대관식이 중국과 러시아 등 사회주의·전체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서방 동맹국의 연대를 확인한 자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대관식이) 영국 군주제가 지속 가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했고, 안정과 연속성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관식 직후 트위터에 “양국의 지속적인 우정은 국민 모두를 위한 힘의 원천”이라고 썼다.

지난 5일 한덕수 국무총리(가운데)와 찰스 3세 영국 국왕(왼쪽)이 대관식 환영 리셉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한덕수 국무총리(가운데)와 찰스 3세 영국 국왕(왼쪽)이 대관식 환영 리셉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한 총리는 하루 전 버킹엄궁에서 열린 환영 행사(리셉션)에 참석해 찰스 국왕과 대화를 나눴다. 한 총리는 “한국과 영국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까운 나라”라고 말했고, 찰스 국왕은 북한 문제와 한국 방위산업 등에 관해 질문한 뒤 “윤석열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축하 메시지를 통해 “중국과 영국 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평화·발전·상생·협력의 역사적 조류를 함께 추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날 행사에 홍콩 반환 전 영국과의 ‘자치권 보호’ 약속을 무시하고 탄압을 자행한 한정 부주석을 대표로 파견해 반발을 샀다.

관습 깨고 21세기 변화 반영

이번 대관식에서 영국 왕실은 전통을 변형시켜 현대 사회상을 최대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관식을 놓고 빚어진 논란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행사 참석자 가운데 귀족의 비중은 확 줄이고 ‘코로나19 영웅’ 등 지역사회 봉사자 등을 대거 대관식에 초청했다.


환경에 대한 배려로 왕비의 왕관, 예복 일부와 장갑, 의자 등은 선대 왕과 왕비들의 것을 재사용했다. 의식에 쓰이는 성유는 식물성 기름으로, 초청장은 재생용지로 만들었다. 다양성 존중을 위해 성직자 행렬에는 영국 국교회 외에 무슬림, 힌두교, 불교 등을 동참시켰다. 찰스 국왕은 역대 처음으로 “모든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여성 사제가 성경을 낭독한 것도 처음이다.

대관식의 주요 역할을 소수민족이 맡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대관식을 통해 군주제를 현대적으로 스타일링해 찰스 국왕을 지도자가 아니라 (동화의) ‘주인공’으로 소개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평가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