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내는 저항'의 예술…하이디 부허가 뜯어낸 과거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댓글 기대평 이벤트]
-자세한 내용은 기사 하단에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하단에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의 후폭풍을 겪어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여성에겐 더 가혹한 시기였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전쟁까지 겹쳐 여성이 자기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건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 스위스의 하이디 부허(1926~1993)가 그런 예술가였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첫 아시아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엔 말랑말랑한 재료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단하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과거의 것들을 깨부수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부허는 스키닝 기법을 통해 서재 등 남성의 공간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사들의 서재 파르케트 플로어링’(1979)이 그렇다. 부허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서재를 2년에 걸쳐 스키닝한 후 46개의 조각으로 잘라낸 벽에 걸었다. 권위적인 공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서재는 남성, 부엌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린 것이다. 높이 3m, 너비 5m의 거대한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지닌 질병을 히스테리(신경증)로 치부하고 정신병원에 가뒀던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을 스키닝해 전시장에 옮겨왔다. 이런 부허의 작품은 당시 무척 보수적이던 스위스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부허의 아들 인디고는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곳”이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리석, 나무, 청동 등 딱딱한 조각과 달리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 누구나 작품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에선 부허의 작품을 복제해 관람객이 입어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는 6월 25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 스위스의 하이디 부허(1926~1993)가 그런 예술가였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첫 아시아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엔 말랑말랑한 재료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단하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과거의 것들을 깨부수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부드러운 재료로 사회에 저항
스위스 출신 설치미술가 부허는 부드러운 재료로 사회에 저항했다. 부허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가 개발한 ‘스키닝(skinning)’ 기법부터 알아야 한다. 딱딱한 바닥과 벽에 액체로 된 라텍스를 바른 뒤 마르면 한 겹씩 벗겨내는 기법이다. 마치 공간에 말랑말랑한 피부를 붙인 후 이를 벗겨내는 듯하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부허의 개인전 제목이 ‘공간은 피막, 피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부허는 스키닝 기법을 통해 서재 등 남성의 공간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신사들의 서재 파르케트 플로어링’(1979)이 그렇다. 부허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서재를 2년에 걸쳐 스키닝한 후 46개의 조각으로 잘라낸 벽에 걸었다. 권위적인 공간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서재는 남성, 부엌은 여성의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린 것이다. 높이 3m, 너비 5m의 거대한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지닌 질병을 히스테리(신경증)로 치부하고 정신병원에 가뒀던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을 스키닝해 전시장에 옮겨왔다. 이런 부허의 작품은 당시 무척 보수적이던 스위스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부허의 아들 인디고는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될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곳”이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말랑말랑…‘조각의 개념’을 깨다
부허의 작품이 재조명받는 건 그가 단순히 ‘해체’에만 머무르지 않아서다.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는 잠자리 날개, 조개껍질, 생선 비늘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부허가 즐겨 쓰던 소재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짝거린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문지윤 아트선재 디렉터는 “반짝인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건 흐르고 변화한다는 뜻”이라며 “부허는 이런 소재를 통해 권위의 해체를 넘어 변화를 추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부허의 ‘말랑말랑한 예술세계’가 깨부순 건 남성중심적 관념뿐만이 아니다. 그는 조각에 대한 고정관념도 깼다. 1970년대에 선보인 ‘입을 수 있는 조각’ 시리즈가 대표적이다.대리석, 나무, 청동 등 딱딱한 조각과 달리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 누구나 작품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에선 부허의 작품을 복제해 관람객이 입어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는 6월 25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